米国の声(VOA)

 北韓軍パイロットたちが最近、シリア政府軍を助けて内戦に参戦したという主張が提起され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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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英国ロンドンに本部を置いている「シリア人権観測所」は、少なくとも15人の北韓軍パイロットが政府軍の攻撃用ヘリコプターを操縦して、北部アレッポ地域で武装勢力を攻撃したと主張しました。

 英国で発行されているアラビア語の日刊紙『アルクドゥス』もブルハン・ガリウン『シリア国家委員会』の初代議長の言葉を借りて、シリア政権が北韓軍パイロットを雇って反乱軍への空襲を遂行していると報道しました。

 ガリウン議長は、シリア空軍パイロットの相当数を占めるスンニ派の離脱が増えたため、北韓へ空軍兵力を要請したものと見られると主張しました。

 シリア人権観測所は去る6月にも、北韓軍将校がアレッポで政府軍砲兵部隊を支援したと発表しました。

www.voakorea.com 2013-11-11

2013/11/12 05:58 2013/11/12 05:58

岡崎久彦: <古代史를 읽으면 日本과 百済의 近親관계는 뭔가 이상할 정도로서 역사의 뒤편에 감춰진 사실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趙甲濟

 盧泰敦 서울대 교수는 '三国統一戦争史'에서 亡國의 恨을 품고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인들이 일본의 正史인 日本書紀(일본서기)를 쓰는 데 직간접으로 관계하여 신라를 부정적으로 보는 역사관을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심었고, 이것이 지금의 韓日 갈등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취지의 기술을 하고 있다. 필자는 수년 전부터 이와 비슷한 글을 써 왔다. 오늘의 韓日 갈등, 그 深層에는 신라와 백제의 갈등이 깔려 있다는 의미였다. 日本書紀는 8세기 초에 간행된 일본 최초 正史(일본 정권이 편찬한 공식 역사서)인데, 正史이므로 이 책에서 기술한 부정적인 新羅觀은 그대로 일본에서 국가적, 국민적, 공식적 對신라관-對한국인관으로 굳어졌다는 이야기이다.

 新羅와 百済의 近親憎悪가 韓日간의 憎悪로 変質
 日本書紀와 이 책에 쓰여진 역사관을 배우고 자란 일본인들은 백제에 대하여는 좋은 감정을, 新羅(韓国)에 대하여 惡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大使出身의 外交評論家인 오카자키 히사히코(岡崎久彦)씨는 1970년대 한국주재 일본 대사관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웃나라에서 생각한 것’이란 책을 썼는데, 한국의 정치와 역사에 대한 가장 균형 잡힌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 80代인 오카자키 히사히코씨는 지금도 자민당 정부에 전략적 助言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이 책에서 노태돈 교수가 쓴 ‘呪術’과 비슷한 의미로서 ‘백제의 亡靈’이란 표현을 했다.

 <日本과 新羅 사이의 안티파시(antipathy․뿌리 깊은 憎悪心) 속에는 신라와 백제의 近親증오적인 안티파시가 그대로 들어가 있다는 느낌이다. 즉, 신라의 일본에 대한 경계심 속엔 백제에 대한 경계심이 섞여 있고, 일본의 신라에 대한 감정적 嫌悪 속에는 백제계 遺民의 영향이 짙은 日本 朝廷의 新羅嫌悪라는 요소가 크게 작용한 것은 아닐까? 古代史를 읽으면 일본과 백제의 近親관계는 뭔가 이상할 정도로서 역사의 뒤편에 감춰진 사실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가 戰前에 소학교 때 배운 상식도 그러하였다. 백제는 일본에 文字와 仏教를 전해준 좋은 나라이고, 신라는 熊襲(웅습․규슈 남부의 미개 부족)의 오야붕(두목) 같은 나라로서, 일본이 공격하면 즉시 항복하여 충성을 맹세하는 나라로 묘사되어 있었다. 사람에 따라선 일본 조정의 書記 등은 모두 백제계 인물이므로, 역사 등도 백제에 유리하도록, 신라는 나쁜 것으로 기록하여, 일본인의 조선인 멸시는 이 백제계 사람들의 신라멸시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이도 있다. 日本書紀에는 百濟記, 百濟新撰(백제신찬), 百濟本記라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은 百濟의 古記를 여러 군데서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들도 文體를 보면 백제 사람들이 야마토 조정에 제출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란 說이 최근에 유력해졌다.>

 新羅에 대한 呪詛를 위해 쓰여진 日本書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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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神話와 事実이 뒤섞여 있고, 歪曲과 조작이 심한 日本書紀(720년 発刊)를 읽어보면 半分이상이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와 관련된 기사이다. 이 책의 집필진은 가야 백제를 자신들의 편으로, 신라를 主敵 내지 屬國으로 간주하는 서술방법을 택하고 있다. 신라가 韓半島를 통일한 뒤에는 이런 적대감과 경멸감이 韓民族에 대한 감정으로 바뀌어 오늘날 韓日민족감정의 한 축이 형성되는 것이다. 일본 고대사의 가장 큰 수수께끼는 왜 일본 정권이 신라를 그토록 미워하게 되었는가 이다.

 日本書紀 欽明천황 23년7월 기사에는 任那(가야지방에 있었다는 일본의 기지)를 도와 신라를 치려고 파견되었다가 신라군에게 포로가 된 調吉士(귀화 백제인 氏族)란 사람에 대한 내용이 있다.

 <新羅 将軍이 칼을 빼어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억지로 바지를 벗겨 궁둥이를 내놓고 일본을 향하게 하고 큰 소리로 '일본 대장은 내 엉덩이를 먹어라'고 말하게 하였다. 그는 그런데 큰 소리로 '신라왕은 내 엉덩이를 먹어라'고 했다. 그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전과 같이 부르짖었다. 이 때문에 죽었다. 그 아들도 아비의 시신을 안고 죽었다. 그의 처 大葉子 또한 잡힌 몸이 되었다. 슬퍼하여 노래를 불렀다. '한국의 城上에 서서 大葉子가 領巾을 흔드는 것이 보인다. 難波(나니와)를 향해서'.>

 倭人으로 귀화한 백제인이 倭를 위해 싸우다가 신라군에 잡혀 고문을 받으면서도 생명을 던져 倭에 충성을 바치고, 신라군의 포로가 된 그의 아내는 천황이 있는 難波를 향해서 충성의 깃발을 흔든다. 이런 글을 쓴 사람들이 조국을 신라에게 빼앗겨 돌아갈 고향이 없어진 백제系 일본인이었다면 이해가 간다.

 西紀 562년 신라가 大伽倻, 지금의 高靈을 점령하여 가야국이 최종적으로 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의 欽明천황은 이런 한탄을 한다. 日本書紀에 적혀 있는 대목을 옮긴다.

 <新羅는 서쪽 보잘것없는 땅에 있는 작고도 더러운 나라이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며 우리가 베푼 은혜를 저버리고 皇家를 파멸시키고 백성을 해치며 우리 郡縣을 빼앗았다. 지난날에 우리 신공황후가 신령의 뜻을 밝히고 천하를 두루 살피시어 만백성을 돌보셨다. 그때 신라가 天運이 다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애걸함을 가엾게 여기사 신라왕의 목숨을 살려 있을 곳을 베풀어 번성하도록 하여주었다. 생각해보아라. 우리 신공황후가 신라를 푸대접한 일이 있는가. 우리 백성이 신라에게 무슨 원한을 품었겠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긴 창과 강한 활로 任那(伽耶地方)를 공격하여 온 백성을 죽이고 상하게 하며 肝과 다리를 잘라내는 것도 모자라 뼈를 들에 널고 屍身을 불사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미마나의 우리 친척과 모든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

 하늘 아래의 어느 백성이 이 말을 전해 듣고 가슴 아프게 생각지 않겠는고. 하물며 황태자를 비롯하여 朝廷의 여러 大臣들은 그 자손들과의 情懷(정회)를 회상하며 쓰라린 눈물을 흘리지 않겠느냐. 나라를 지키는 중책을 맡은 사람들은 윗분을 모시고 아랫사람들을 돌보아 힘을 합하여 이 간악한 무리에게 천벌을 내리게 하여 천지에 맺힌 원한을 풀고 임금과 선조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신하와 자손의 길을 다하지 못한 후회를 뒷날에 남기게 될 것이다.>

 欽明天皇은 '그들(新羅)은 任那의 우리 친척과 모든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고 말했다. 大伽倻 지역의 사람들을 倭의 천황이 '친척'이라고 부른다. 이는 고대 일본을 세운 主力 세력이 伽倻에서 규슈를 거쳐 近畿지방(나라, 교토)으로 건너간 伽倻人들임을 암시한다. 동시에 일본의 天皇家가 가야계통 사람들임을 추정하게 한다.

 전쟁과 천재지변이 가장 많았던 신라
 日本과韓半島의 관계는 영국과 유럽대륙의 관계와 비슷하다. 오늘의 영국은 원주민을 정복한 로마 사람들, 로마군이 철수한 뒤엔 독일에서 건너간 앵글로와 색슨족, 덴마크-노르웨이에서 건너간 바이킹족, 그리고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방에서 건너간 바이킹系 노르만族이 섞여서 만들어낸 나라이다. 일본도 한반도에서 건너간 고구려족, 신라족, 가야족, 백제족이 각축하고 협력하여 만든 나라이다.

 지금 慶南地方에 있었던 가야족은 일찍부터 현해탄을 건너 北규슈에 근거지를 만들어 한때는 韓日 양국에 걸친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신라 사람들은 일본 동해안의 시마네 지방으로 많이 건너갔다. 北규슈에서 힘을 기른 가야족은 세토나이카이라는 內海와 연안지방을 경유하여 나라, 교토 지방으로 진출, 여기에 일본 고대국가 大和를 세운다. 이 伽耶勢力은 天皇家를 이루는데, 한반도의 本家, 즉 가야 잔존세력을 계속 유지하려다가 보니 가야에 위협적인 신라에 대항하여 백제와 전략적 동맹을 맺게 된다. 백제의 지식인들이 우호국인 倭로 많이 몰려가 伽耶系 天皇家를 떠받치는 관료집단을 형성하고 문자와 불교를 전하여 倭의 발전에 기여한다.

 자연히 倭-伽耶-百済連合전선이 형성되어 신라를 압박한다.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여기에 대항하다가 강성해지자 고구려에서 독립, 6세기 중반 진흥왕 때는 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 결전에서 가야+왜+백제 연합군을 섬멸하여 100년 뒤의 삼국통일의 길을 연다.

 한국 역사학계의 원로학자인 申炯植(신형식) 교수가 쓴 '新羅通史'(주류성 출판사)에는 재미있는 통계가 있다. 삼국시대의 전쟁통계이다. 전쟁을 가장 많이 한 나라는 신라로서 총174회이다. 다음이 고구려로서 145회, 백제는 141회이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 가야, 倭와 싸웠다.

 고구려는 중국 및 북방민족과 가장 많이 싸웠고 백제와는 다음으로 많이 싸웠다. 백제는 신라와 가장 자주 싸웠다.

 신라는 지진, 가뭄, 태풍과 같은 천재지변에서도 삼국 중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다. 申교수가 三國史記를 분석하여 통계를 냈다. 삼국시대에 한정해보면 신라는 322회의 천재지변을 겪었다. 백제는 191회, 고구려는 153회였다. 申교수는 천재지변이 가장 많다는 것이 오히려 신라를 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삼국사기의 記事 내용을 분석해보면 신라는 정치에 관한 기사가 가장 많다고 한다. 정치란 권력승계를 평화적으로 하는 기술이고 지배층 내부 및 백성들과 지배층 사이의 단합을 도모하는 예술이다. 신라는 왕위 계승이 가장 안정적으로 된 나라이다. 지배층과 백성 사이의 단합도 삼국 중 가장 성공적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군사적 승리 이전에 정치와 외교의 승리였다.

 申교수는 신라가 수행한 수많은 전쟁의 긍정적 면을 이렇게 분석했다.
 <전쟁은 제도개혁이나 정치반성의 계기를 제공했고, 이것이 사회발전의 轉機를 가져왔다. 특히 신라는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확장시켰으며, 對唐전쟁을 통해서 백제 고구려의 殘民을 하나의 민족대열에 융합했다. 신라는 對外전쟁을 민족적 自覺과 융합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전쟁과 천재지변은 국가가 당면하는 가장 어려운 과제이다. 이 난관을 성공적으로 돌파한 나라나 인간은 강건한 체질을 터득하게 된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逆境을 극복한 결과였다. 역사에 공짜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국가로서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통일인데 남북통일이 요행수나 공짜로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학이 아닌 미신이다.

 親新羅政権 天武天皇
 서기 645년 일본 천황가에 쿠데타가 발생한다. 주모자 中大兄(나카노오오에)皇子는 皇極천황을 폐위시키고 孝德천황을 등극시킨 뒤 자신은 황태자가 되어 실권을 잡았다. 이 政變에서 그를 결정적으로 도운 동지가 있었으니 백제 王族으로 추정되는 나카토미노카마타리(中臣鎌足)였다.

 정권을 잡은 나카노오오에는 大化의 改新이라 불리는 일대 개혁을 단행한다. 황족 및 지방의 귀족과 호족들이 갖고 있던 토지 및 백성들의 소유권을 천황의 公地와 公民으로 만들었다. 전국적으로 이들 땅과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한 중앙집권적 행정기구, 전국에 통용되는 획일적인 세금제도를 만들었다. 나카노오오에는 大化라는 年號를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쓰게 하였다.

 年号를 이때 처음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천황의 지배력이 일본 全土에 처음으로 미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중앙집권적인 권력의 출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大化改新의 주도세력은 親百濟 정책을 썼다. 서기 660년에 백제가 唐과 신라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자 당시의 천황(齊明)은 직접 사령관이 되어 백제 부흥운동파를 돕기 위한 구원군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천황은 중도에 사망하는데 실권자 나카노오오에는 바톤을 이어받아 약3만 명의 병정과 수백척의 군함으로 구성된 대함대를 금강 하류의 서해연안으로 보냈다. 일본 역사에서 白村江의 해전으로 유명한 이 싸움에서 신라-당 연합군은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서기 663년의 일이다.

 中大兄는 羅唐 연합군이 일본으로 쳐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수도를 大津로 옮기고, 대마도, 규슈 등 곳곳에 성을 쌓게 하고 스스로 천황(天智) 자리에 올랐다. 그는 백제로부터 건너온 지식인, 관료, 귀족들을 우대하여 그들로부터 선진 문화 및 행정술을 배웠고 이를 국내 개혁에 활용했다. 개혁자 나카노오오에, 즉 天智천황은 서기 671년에 죽고 아들이 弘文(홍문)천황으로 등극한다. 이 등극에 불만을 품은 나카노오오에의 동생 오오아마(大海人)皇子가 반란을 일으켰다.

 오오아마측에는 신라에서 건너온 渡來人들이 붙었다. 신라의 문무왕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叛軍을 지원하였다는 설도 있다. 천황측에는 백제 도래인들이 섰다. 한반도 통일전쟁의 축도판적인 싸움이 벌어진 것인데 신라 도래인들이 밀던 반군이 이겨 홍문천황을 자살케 한 뒤 오오아마를 天武천황으로 추대했다. 親新羅 정권이 선 것이다. 이 반란을 ‘壬申의 亂’이라 부른다.

 天武천황은 14년간 집권하면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2~3년에 한번씩 대규모 사절단을 신라에 보내 신라의 발달된 제도와 문화를 배워왔다. 신라도 거의 매년 사절단을 일본에 보냈다. 신라는 對唐결전을 벌이고 있을 때여서 일본이 唐과 손을 잡지 않도록 하는 데 외교의 중점을 두었다. 이 시기 왜는 唐과 국교를 끊고 신라 하고만 교류함으로써 ‘우호적 중립’을 지켰다. 최근의 한일관계를 제외하면 이때 두 나라 사이가 가장 좋았다.

 本家와 分家의 相互尊重
 일본 역사학자 井上 淸 박사는 天武天皇이 신라로부터 통일 국가 만들기에 대한 노하우를 열심히 배워 律令을 정비하고 고대 일본 국가를 완성했다고 평가하였다.

 天武天皇은 역사 편찬을 지시하였으나, 日本書紀가 완성된 것은 그가 죽은 뒤인 서기 720년이었다. 日本書紀를 편찬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이는 백제 왕족 출신으로 나카노오오에의 쿠데타를 도왔던 나카토미노카마타리(中臣鎌足)의 아들 藤原不比等였다. 후히토는 親新羅정권이던 천무천황 시절엔 숙청을 면하는 데 급급하였으나 그 후 문무천황 옹립에 성공하여 政界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가 편찬을 주도한 것으로 추정되는 日本書紀가 신라를 매도하는 편향적인 기술방향을 갖게 된 것은 그가 백제 왕족의 후손이란 점, 親신라적인 천무천황 시절 핍박을 받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자연스런 것이다.

 不比等의 아버지 中臣鎌足은 죽기 직전 天智천황으로부터 후지와라(藤原)란 姓을 받아 후지와라노카마타리(藤原鎌足)가 된다. 그 후 수백 년 동안 백제계 후지와라 집안이 천황의 황후들을 배출하는 外戚으로서 일본의 정권을 장악, 反신라 정책과 反신라적 시각을 일본인의 역사와 유전자 속에 심었던 것이다. 이런 反신라 감정은 고려-조선-대한민국으로 이어지면서도 傳承되어 反韓감정으로 고착된 것이다.

 新羅에 패배한 백제와 倭人이 흘린 피와 원한의 呪術에서 벗어나려면, 오늘의 일본인들은 古代史의 진실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고, 한국인들은 일본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정리하여야 할 것이다.

 일본이 한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을 지원하는 것은, 이 주술에 걸린 일본인들이 스스로 이 주술을 깨는 일이다. 일본 보수층을 대표하는 앵커우먼 출신의 일본 저널리스트 사쿠라이 요시코씨는 '세상은 의외로 과학적이다'는 책에서 이런 요지의 글을 썼다.

 <혈연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민족은 일본인, 한국인, 몽골인이다. 한국인과 몽골인이 本家이고 일본인은 分家인 셈이다. 일본인은 本家에 감사해야 한다. 동시에 일본인은 한반도를 거쳐 일본 땅에까지 와서 좋은 나라를 만든 조상들의 진취성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本家인 한국인들도 分家의 이런 업적을 평가해주었으면 한다>

 日本人이 韓民族에 感嘆하였을 때
 서기 676년 일본의 天武천황은 唐과 싸우는 신라에 物部麻呂(모노노베노마로)라는 사람을 대사로 보낸다. 이때 일본은 신라 편에 서기로 하고 親신라 정책을 펴고 있을 때였다. 신라로 떠나는 마로 대사에게 지금의 국방부 차관에 해당하는 사람이 부탁했다.
 “신라에 가거든 모노노베씨, 부탁이 있는데 그 나라의 兵制를 보고 왔으면 하네”

 그는 부연설명을 했다.
  “신라는 300년 동안 전쟁만 한 나라이다. 백제와 싸워 이기더니 북방의 강국 고구려와 싸워서도 이겼다. 지금은 세계제국인 唐을 상대로 한반도의 통일과 민족의 독립을 걸고 싸우고 있다. 당연히, 군사면에선 물론이고 전략전술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보다 앞서 있을 것이다“

 국방차관은 이렇게 덧붙였다.
 “만약 전투가 있으면 직접 戰場에 나가서 唐과 신라의 전법을 보고 오게.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은 신라가 어떻게 하여 唐과 싸우고 있는지 알아야 우리가 방위책을 세우는 데도 도움이 될 걸세”

 신라 파견 大使가 된 마로가 신라에 가서 본 것은 大國 唐에 대해서는 표면적으로는 순종하면서도 싸워야 할 때는 국가의 존망을 걸고 싸우는 韓民族의 모습이었다.

 신라는 唐과 싸우면서도 불리하면 唐의 황제에게 굴욕적인 사과문을 보냈다. 이제는 신라가 손을 들겠구나 하고 안심하고 唐軍이 쳐들어오면 신라는 다시 들고일어나 백제, 고구려 유민과 함께 손을 잡고 唐軍을 격퇴했다.

 마로 大使는 일본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면 抗戰, 일면 사과’의 신라 전술을 보고는 “대륙에 붙어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이런 굴욕도 참지 않으면 안 되는구나”하는 이해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로 대사는 신라 사람들이 굶어가면서도 對唐결전의지를 꺾지 않는 것을 보고는 감탄한다. 마로 대사는 “지금이야말로 唐軍을 몰아내어 한민족의 국가적 통일을 달성하기 위하여 싸워야 한다는 열정으로 모두가 불타고 있다”고 판단했다.

 676년 겨울 신라는 서해의 기벌포에서 唐의 해군과 決戦한다. 신라 해군은 초전에서는 졌으나 곧 반격을 개시하여 결국 唐軍을 패퇴시킨다. 마로는 이 전투를 구경한다.
 <唐船이 패주하는 것을 보고 신라의 장병들은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는 듯했다. 추격을 중단하고 도망가는 唐船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겨우 자신들이 唐에 이겼다는 것을 깨닫고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배의 갑판 위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신라의 승리에 충격을 받은 것은 일본 사절단이었다. 唐은 白村江 해전에서 일본해군을 전멸시킨 超강대국이었다. 지금의 상황으로 국제비교를 해보면 唐과 신라는 지금의 미국과 한국의 차이보다 국력 차가 더 컸다. 그 작은 나라 신라가 세계제국인 당을 무찌르고 독립을 지켜낸 것이다. 서기 676년 음력11월의 일이었다. 신라의 판도는 지금의 한국에다가 북한의 3분의 1을 보탠 규모였다. 마로는 통일신라와 우호관계를 맺고 677년 2월1일 귀국했다.

 위의 내용은 ‘古代로부터의 증언-壬申의 亂’이란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산케이신문 편집위원 야기소우지(八木莊司)씨이다. 천무천황은 신라의 실력을 알아본 뒤 30년 동안 唐과는 국교를 단절하고 신라하고만 대규모 사절단을 교환한다. 일본은 이 30년간 신라로부터 선진문물과 제도, 특히 통일국가를 완성시킨 비결을 배워 와서 일본의 고대국가를 정착시키는 개혁을 한다.

 天武天皇은 壬申의 亂이란 쿠데타로 집권할 때 신라 渡来人의 지원을 받았었고 그 자신이 신라계 사람이란 說도 있다. 唐에 만약 신라가 복속해버렸다면 오늘날 한민족은 존재하지 않고 그때 이미 중국인화되었을 것이다. 신라를 속국으로 만든 唐은 元이 고려를 복속시킨 뒤 그랬던 것처럼 신라군과 함께 일본을 침공하였을 것이다.

 신라의 對唐결전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일본인도 없었을지 모른다. 新羅가 唐의 정복정책에 브레이크를 걸었기 때문에 그 뒤 약 200년간 동아시아에선 평화가 유지되고 찬란한 문명이 꽃피었다. 당시 唐은 세계文明의 중심을 잡았고, 신라는 선진국이었다. 新疆성의 省都인 우루무치의 박물관에 가 보면 당나라 때의 지도가 있다. 唐과 陸續한 나라는 전부 青色인데 유일하게 韓半島만 白色이었다. 신라가 대륙의 유일한 독립국이었던 것이다.

 新羅를 미워하는 속성을 가진 일본인들도 감탄한 신라의 三国統一을 저주하고 깎아내리는 것을 業으로 삼고 있는 역사학자들이 한국에 많다. 민족사의 가장 중요하고 영광스러우며 결정적인 위업을 굳이 부정하려 드는 것은 신라의 민족통일국가 수립의 바탕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의 建國을 부정하기 위함이다. 新羅의 三国統一과 大韓民国의 樹立은 민족사의 2大사건이다. 두 사건중 하나를 부정하면 나머지 하나도 부정하게 된다. 자유통일을 지향하는 오늘의 한국인이 교과서로 삼아야 할 것은 신라의 삼국통일이고 참고서로 볼 만한 것은 독일통일이며 反面교사로 경계할 일은 월맹이 성공한 월남적화통일이다.

 벼랑에서 날아버린 新羅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신라의 삼국통일은 벼랑에 몰려 死活을 건 생존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생존투쟁에 나서도록 신라를 벼랑으로 몰아붙인 것은 백제의 의자왕이었다. 신라 삼국통일의 세 元勳 金春秋, 文武王, 金庾信은 원한과 분노와 걱정을 담고 산 사람들이다. 이런 감정이 그들뿐 아니라 신라지도부에 위기의식을 심어 젖먹던 힘까지 다 쏟아내는 생존투쟁을 하도록 만들었다. 여기서 超人的인 힘이 모여 당초 목표보다 더 높은 삼국통일을 가능케 한 것이다. 삼국통일은 신라 지도부에겐 생존투쟁이면서도 일종의 복수극이었다. 이념은 감정이란 말이 있다. 감정이 이념, 즉 공동체의 이해관계에 대한 자각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역사를 바꾸는 수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三国史記 列傳 김유신條에 이런 글이 있다.
 <公의 나이 17세였는데 고구려, 말갈, 백제가 국토를 침략하는 것을 보고 강개하여 구적을 평정할 뜻을 품고 홀로 떠나 중악 석굴에 들어가 재계하고 하늘에 알리어 맹세하기를, '적국이 無道하여 이리와 범이 되어 우리나라를 침요하니 편안한 날이 없습니다. 저는 한 사람의 미약한 신으로서 재주와 힘을 헤아리지 않고 禍亂을 없애기를 뜻하니 오직 하늘이 하강하시어 저에게 능력을 빌려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난승이란 노인을 만나 말하기를 '저는 신라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면 마음과 머리가 아프므로 저의 정성을 민망히 여기시어 방술을 가려쳐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백제 의자왕은 초기에는 海東曾子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善政을 베풀었다. 그의 실수는 외교에서부터 왔다.

 그는 고구려, 倭와 동맹하여 신라를 여러 번 쳤다. 특히 서기 642년 백제 장군 允充이 지금의 합천 大耶城을 친 것이 문제였다. 당시 政界의 실력자 金春秋의 사위 品釋이 대야성을 지키고 있다가 妻子와 함께 항복했다. 윤충은 품석 부부와 자녀들을 모두 죽이고 머리를 잘라 의자왕에게 보냈다. 왕은 윤충을 표창하고 신라 사람 1000명을 잡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종일 기둥에 의지하여서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하더니, 얼마 후에 말하기를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랴'하고 곧 왕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臣이 고구려에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수를 갚고싶습니다'라고 하니 왕(선덕여왕)이 허락하였다'고 한다(삼국사기).

 대야성의 비극은 金春秋의 원한이 되었지만 그는 목숨을 건 통일외교로써 이 원한을 민족통일 의지로 승화시킴으로써 역사를 바꾸어놓았다. 백제는 대야성에서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항복한 敵將을 죽임으로써 신라 지도부에 원한을 심어 결국은 결정적 패배를 자초하고 만다. 백제군이 항복한 김춘추의 사위와 딸을 죽인 데는 아마도 서기 554년에 진흥왕의 군대가 관산성(지금 충북 옥천) 싸움에서 백제의 聖王을 죽인 뒤 시체를 땅속에 파묻고 밟아버린 것에 대한 복수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金春秋는 고구려, 일본, 唐을 오고가면서 동맹외교를 시도하다가 羅唐동맹을 성공시킨다. 당시 세계최강대국과 손잡은 신라는 백제-고구려-왜의 남북3國동맹을 차례로 격파한 뒤에는 唐과 결전하여 삼국통일을 완성한다. 30여년이 걸린 통일과정이었다.

 신라의 승리와 백제의 패배는 동맹국의 선택에 의하여 결정났다. 삼국사기의 편집책임자 金富軾은 백제本紀의 마지막 장에서 평하기를 '백제는 이웃과 친하게 지내지 못했고 大國(唐)의 명령을 어겼으니 그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이승만이 6.25 전쟁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 韓美동맹을 만들어 자유통일의 발판을 놓은 것은 김춘추가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목숨을 건 외교로써 羅唐동맹을 맺어 삼국통일의 근거를 구축한 것과 통한다. 노무현식으로 동맹을 우습게 여기는 자세는 위기의식이 없이 오만하다는 증거이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당하여 동맹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는 自蔑을 예약한다.

 서기 660년 羅唐연합군은 사비성을 점령하여 백제를 멸망시킨다. 삼국사기엔 金法敏(뒤에 문무왕)이 복수하는 장면이 나와 있다.
 <의자왕의 아들 隆이 대좌평 천복 등과 함께 나와 항복하니, 金法敏(뒤에 문무왕)은 융을 말 앞에 꿇리고 그 낯에 침을 뱉으며 꾸짖기를, '지난 날 너의 아비가 내 누이를 원통하게 죽이고 옥중에 묻어 나로 하여금 20년간 마음 아프고 머리 앓게 하였으니, 오늘의 네 목숨은 나의 손에 있다'하니 융은 땅에 엎드려 아무 말이 없었다(서기 660년)>

 唐은 백제를 친 신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이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舊백제땅을 다스리게 하니 신라는 불만이 많았다. 唐은 패전국의 왕자인 부여융과 승전국의 王인 문무왕이 일종의 의형제 관계를 맺어 화해선언을 하도록 강요했다. 한때 부영융의 얼굴에 침을 뱉었던 문무왕으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백제 부여융을 세워 웅진도독으로 삼아 제사를 받들고 옛 땅을 보존케 하니 신라와 서로 의지하여 여국이 되고 각자 묵은 감정을 없애 화친을 맺을 것이며 각각 詔命(조명)을 받들어 번속이 되어야 한다' 운운(서기 665년 文武王과 부영융의 웅진 취리산 盟文)>

 西紀668년 羅唐연합군은 평양성을 쳐서 드디어 고구려를 멸망시킨다.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어 고구려 땅을 다스리고, 백제땅은 부여융이 대리통치를 하도록 하고, 신라의 문무왕은 鷄林대도독으로 임명하여 한반도를 속국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문무왕과 김유신은 이에 對唐결전을 결심하고 먼저 舊백제땅을 공격한다. 唐이 설인귀 장군 이름으로 경고서한을 보낸다. 문무왕이 쓴 답장엔 이러한 대목이 있다.

 <'신라와 백제는 屢代의 깊은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형상을 보면 따로 한 나라로 자립할 모양이니 100년 후에는 자손들이 반드시 呑滅(탄멸)될 것이다. 新羅가 이미 국가의 州인 이상 두 나라로 나눌 수 없는 일이니 원컨대 한 집안이 되어서 길이 후환이 없도록 해달라'하였소(671년 문무왕이 唐將 설인귀에게 보낸 편지에서).>

 즉 新羅가 절망적 상황에서 당시 세계최대의 帝国과 決戦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것은, 韓半島에 대한 唐의 통치가 오래 가면 百済가 다시 일어나 신라를 쳐서 자손들을 다 죽일 것이라는 공포감이었다. 新羅는 또 벼랑에 몰린 것이다. 이 벼랑에서 떨어죽느니 날아버리겠다고 높이 뛰었다. 運도 따라주어 신라는 對唐결전에서 승리하여 한반도를 민족의 보금자리로 만들었다. 伽倻에서 규슈를 거쳐 近畿地方(奈良, 京都)으로 건너간 伽倻人들임을 암시한다. 동시에 일본의 天皇家가 伽耶계통 사람들임을 추정하게 한다.

www.chogabje.com  2013-11-09 10:33

2013/11/09 23:53 2013/11/09 23:53

今回、検察の捜査を積極歓迎し、検察に次のことを要求する。

                                                      自由青年連合

 検察が「全公労(全国公務員労働組合)」に対して捜査の刃を抜いた。

 法外労組である「全公労」は14万人の巨大組織だ。この不法公務員団体が、昨年の18代大統領選挙のとき民主党の文在寅候補側と政策協約を結び、選挙を支援したことが知られている。国家公務員である彼らは、公務員の選挙中立の精神を捨て、野党候補の文在寅候補側を支援して選挙法違反と国家公務員法違反の疑いを受けている。政治的に中立すべき国家公務員たちが、野党大統領候補側に立って政治に関与して選挙に関与し大統領選挙を乱して良いの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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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今まで国民は巨大組織を恐れて彼らの不正行動も見逃してやり、また彼らの政治行為を傍観したのも事実だ。もう彼らの不正と政治行為を黙認する訳にはいかなくなった。政治的中立は国家公務員の最も重要な原則だ。ところが、「全公労」は14万人の多数でその原則を守らなかった。

 今、国民はこれ以上彼らの法治無視行動を座視せず、彼らに鉄槌を下す告発措置を取った。私たちは今回、「全公労」の公職選挙法と国家公務員法違反を全国民に知らせることで今後、国家公務員が政治介入や選挙介入が許されないことを思い知らせ、力の論理で大韓民国の政治を牛耳られなくする。

 今回、検察の捜査を積極歓迎し、検察に次のことを要求する。
 検察は「全公労」の公職選挙法違反と国家公務員法違反に対して徹底捜査して関係者を厳重処罰することと、「全公労」だけでなく「全教組」や「法院労組」など左派性向の公務員たちまで、昨年の大統領選挙のとき野党候補支持のインターネット書き込みを全数調査し、違法事実が確認されれば、抜本塞源の強力な処罰を要求する。

2013年11月6日
自由青年連合、従北剔抉騎士団などの愛国青年一同

*「全公労」処罰と統進党解体を要求する記者会見案内*
11月6日(水)午後2時、ソウル南部地検前で自由青年連合、従北左翼剔抉団、ママ部隊などが「全公労の大統領選挙介入処罰要求記者会見」を行います。

www.chogabje.com 2013-11-05 17:09

2013/11/06 11:25 2013/11/06 11:25

解散請願から9年ぶりに政府が統進党解散請求を決定!

                                                      国民行動本部

 法務部は11月5日、統合進歩党に対する違憲政党解散を憲法裁判所に請求した。国民行動本部は法務部の決定を全的に歓迎する。

 黄教安法務部長官は、“統合進歩党は綱領など、その目的が憲法の自由民主的基本秩序に反する北韓式社会主義を追求する”と説明した。最近、李石基内乱陰謀事件でも明らかになったように、統合進歩党の活動も北韓の対南革命戦略と一致すると発表したのは、法務部が統合進歩党の違憲性を正確に指摘したの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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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国民行動本部は、2004年6月23日、2011年8月26日、2012年5月30日、2013年4月8日の総4回も統合進歩党(旧民主労働党)に対する違憲政党解散請願を法務部に提出した。2004年6月に最初の違憲政党解散請願書を提出してからなんと9年ぶりに法務部が統合進歩党に対する違憲政党の決定を下したのは、遅かったが当然の決定だ。

 国民行動本部は、統合進歩党に対する違憲政党解散請願書で、“統合進歩党の綱領の核心は、労働者が主人になるという共産主義理念の宣伝理論であり、民衆が真の主人になる‘民衆主権’も共産主義の変種である‘民衆民主主義理念’の宣伝理論”であることを指摘したことがある。何よりも旺載山事件と一心会事件など、北と連携した統進党を存置させたら大韓民国が危うくなる。

 今回の法務部と長官の勇断に対して国民の名に敬意を表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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電話:02-527-4515〜6 ファックス:02-527-4517 www.nac.or.kr

www.chogabje.com 2013-11-05 16:00

2013/11/06 08:11 2013/11/06 08:11

                                                           趙甲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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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今日(11月5日)、法務部の統進党解散請求説明文は、この政党を従北を超えた北韓式社会主義革命組織と規定した。にもかかわらず、マスコミはまだ統進党を‘進歩勢力’と呼ぶ。反逆と進歩と呼ぶのだ。こういうメディアの韓国語破壊には天罰が下るだろう。

2.日和見主義的な公権力と左寄りの判事たちの庇護の下、馬鹿騒ぎの特権を享受してき従北政党の統進党が、やっと手強い相手に会ったのだ。大韓民国に君臨しようとしたが、その悪癖が叩かれるよになった。

3.今日11月5日は、憲法が決起した日だ。無視され踏み躙られた憲法が怒って立ち上がって、憲法破壊勢力に対して抜き身を振り回し始めた日だ。11月5日は、韓国の民主主義の発達史において後々まで記憶されるだろう。11月5日、憲法決断の日!

www.chogabje.com 2013-11-05 23:44

2013/11/06 06:47 2013/11/06 06:47

“朝鮮貨幣5千ウォン札もくたびれて貨幣の(金日成)肖像画も見えないくらい”

                                                     自由アジア放送

 アンカー:最近、北韓では大都市はもちろん、地方のチャンマダン(市場)でも中国元が大量流通されると伝えられます。このままでは、北韓貨幣が消えそうだという懸念の声も出ています。

 ジョンヨウン記者が報道します。
 北韓の地方のチャンマダンでは、中国人民元が大量流通されながら北韓貨幣が断わられていると、家族と連絡を取っている複数の脱北者が1日、自由アジア放送に話しました。

 米西部に定着した咸鏡北道出身の脱北女性は数日前、家族との電話通話を通じて品物が全部人民元で取引されるということに驚いたと話します。

 脱北女性:米を買っても1キロ5元だそうです。中国元の5元。なぜ中国元なのと訊いたら、北韓ではもう米を買っても中国元で計算するそうです。私はお金を送っても北韓貨幣に両替せず使います。

 この女性は、自分の家族は大都市でもなく小さな郡所在地に住んでいるのに、そこまで中国元に流通しているのを見れば、北韓全域で中国元が使われていると思われると言いました。

 3年前、北韓を離れたとき当局が人民元の使用を禁止して、中国元を見つけ難かったが、今はどこから得たのか個人が保有する外貨が非常に多くなったと彼は説明しました。

 現在、テレビやノートテル(EVDプレーヤー)、扇風機など、中国から搬入される家電製品は全部ドルか人民元で取引され、北韓貨幣で取引されるものは、庭のほうきやゴミ箱など、北韓で生産された家内手工業製品だけだと彼は付け加えました。

 北韓にいたとき中古品の商売をしたもう一つの在米脱北者は、“保安員や監視隊の取り締まりされるのを避けるため価値のあるものは、携帯に便利な人民元で取引した”と言いました。

 彼は、“今、北韓で闇為替レートで100元は北韓の金13万ウォンで取引されているが、1800元のをテレビを北韓の貨幣で売る場合、北韓のお金では大きな包みにもなる”と指摘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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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外貨の使用が急増したため北韓のお金が市場から消える危機におかれたそうです。
 最近、中国を訪問した南浦市の住民は、“朝鮮貨幣5千ウォン札もくたびれて貨幣の(金日成)肖像画も見えないくらいだ”と言いながら、“この頃、今日の人々は米100ドルのお爺さん(ベンジャミン•フランクリン)が一番強く、その次は100元の毛沢東が強い”と順番を付けていると言いました。

 そのため、北韓の富裕層は額面値が高いドルを貯蓄手段として保管し、中国人民元は基本的流通手段として利用しています。

 彼は“北韓のお金が流通されるためには、高額紙幣をまた発行するか、経済が発展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い、“今、中国の物が溢れているため、朝鮮のお金は、ややもすればチャンマダンからも消えそうだ”と危機感を露わにしました。

www.chogabje.com 2013-11-04 10:13

2013/11/05 02:43 2013/11/05 02:43

‘88万ウォン世代'という侮辱のくびきを脱ぎ捨て‘統一強国'の波に乗りましょう!

                                                           金成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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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月9日の韓国自由連合第2回トーク・コンサートへの歓迎辞]

 教保文庫へ行って見なさい。時代遅れの社会主義ブームです。この国を不平等、不公正、いわゆる資本と権力の搾取や抑圧の地と断定しては左派的解決策を提示した本が書架を埋め尽くしてします。

 間違いです!観念論者たちの寝言です。社会的矛盾の解決は、社会主義のような内向的収斂ではなく、富国強兵という外向的発散を通じてのみ可能だったし可能なのです。

 憲法第4条が命令している自由民主的基本秩序に基づく平和統一、つまり自由統一は、韓半島の地下資源の90%以上が埋葬されている北韓という失地を取り戻し、天文学的な経済特需を生み出す道です。7400万人の国民と2.2倍の国土を持って満州とシベリアに繋がる交易路を開く道です。低迷している韓国経済を一気に回復させる道が自由統一です。非正規職問題解決や青年失業の克服、いわゆる進歩左派が叫ぶ‘人間疎外’を乗り越える道は、すでに滅びた社会主義をまたも実験することではなく、自由統一を通じての一流国家の建設にあります。統一は働き口であり、出路です。

 それだけでしょうか?またあります。自由統一は、南韓内‘従北'の守旧的叛逆を終わらせ、北韓独裁の破倫的暴压を終了させ、70年間の分断と葛藤と内戦に決着をつける唯一の勝利の道です。

 これは、左右、保革、東西、階層、世代まで別れ別れになった韓国を一つにまとめられる唯一の統合への道です。殴り殺さ凍死し飢えて死んでいる凄惨な北韓の2400万同族を解放し、自由と生命を回復させる唯一の救援の道です。行き着くところまで行ってしまったこの国の偽り、扇動、腐敗、淫乱を一掃し、さらに高い先進社会へと跳躍することのできる真の進歩の道です。

 韓国の青年は絶望する理由がありません。‘就職が難しい?’‘景気が悪い?’‘上昇のための梯子が消えた?’落胆する理由もありません。‘88万ウォン世代'という侮辱のくびきを脱ぎ捨て‘統一強国'の波に乗りましょう!先祖の舞台だった草原と大陸を舞台にして一流国家の主人公として活躍することになる英雄がまさに皆さんです!

 今日のこのイベントは、皆さんを歴史の舞台の真ん中に招待する場になる筈です。韓国自由連合は、自由統一と一流国家の完成のその日まで、皆さんと共に前進します。

2013年11月9日、韓国自由連合代表金成昱

http://libertyherald.co.kr 2013-11-04 00:44

2013/11/04 07:53 2013/11/04 07:53

中国軍の介入は内政干渉であり侵略だ。

                                              呂永茂(南北戦略研究所長)

 北韓や韓半島統一に対する中国の内心は何だろうか?
 中国は、北側の継続的な核兵器開発と対南挑発など好戦的政策と飢餓や抑圧など反人倫統治にもかかわらず、北韓を放棄していない。唇滅びて歯寒しの緩衝役割論のためだ。3回目の核実験後、北と中国はぎすぎすとした関係になったが、北韓に対する中国の執念は変わっていない理由でもある。

 そういう執念が北の崩壊の際、中国軍の武力介入論まで出る背景だ。米ランド研究所が最近発表した346ページの分量の‘北韓崩壊対策方案’報告書が、中国軍介入論を改めて浮き彫りにした。同研究所のブルース•ベネット研究員は先月、ソウルである新聞とインタビューし、“金正恩政権の突然の崩壊可能性が非常に大きく、これは常時的なリスクと見做さねばならない”と言った。

 彼は、北の崩壊が金正恩暗殺など内部的要因から触発される筈で、軍内部の武装衝突や人道的な災殃など、あらゆるシナリオに備えなければならないと勧告した。蘇浩・中国外交学院教授も、北韓が核を放棄しない限り、政権の存続はゼロに近いと言った。東ドイツも1989年11月不意に崩壊した。

 金正恩が今年の春“3年以内に武力統一する”、“私が青瓦台に共和国の旗を掲げる”と公言したのも怖い軍をなだめるための空威張りの筈だ。金正恩のあたふた‘硬軟策’の対南行動も、内部の不安を反映する。徹底した鉄拳統治をした金正日に対しても1990年代に二回の暗殺未遂があった。

 北韓崩壊論は金正日の時もあったが、金正恩政権崩壊論は性格が違う。無賃乗車した金正恩は、政治的ビジョンもなく、崩壊の場合、適当な世襲後継者もないのが問題だ。後見人の張成沢と叔母・金敬姫も事態を収拾するにはあまりにも老衰し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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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月16日、香港の明報に掲載された、韓半島有事の際、核団地の寧辺と(黄海道の)長山串にそれぞれ1個旅団の中国軍を進駐させるべきだと主張した香港の月刊誌‘鏡’の梁国樑副編集長の挑発的なコラムが韓国人をドキッとさせた。‘鏡’は中国支配層の内部事情を報道する雑誌で、彼のコラムは中国当局に影響を及ぼし得るため注目された。

 彼は、ランド研究所は“米国と中国が衝突しないためには、両者が必ず事前協議を通じて(北の崩壊と関連した)各種の規則と対処方案を一致させねばならない”と提案した。梁氏は、北韓の突然の崩壊が韓国軍の北進を引き起こし、大きな混乱や大規模の内戦まで発生し得ると警告した。梁副編集長は、中国が周到な対策で“北韓の崩壊による核兵器流失と難民発生、韓国の‘軽挙妄動’を徹底的に防がねばならない”と強調した。

 梁氏は、北韓崩壊の際、中国軍の進入を勧告することで‘韓半島侵略’を当然視し軍事戦略的にも具体的な内容のため、中国側の本音を示したのではないかと疑わざるを得ない。特に、韓国軍の北進を‘軽挙妄動’と言い、内政干渉的傲慢を露骨に現わした。この言動は、6.25戦争の時‘中共軍’の介入で目前の統一が霧散された辛い悪夢を思い浮かばせ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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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国軍は、北韓崩壊のさい5029作戦計画によっていくらでも介入する権利と義務がある。1948年の政府樹立や6.25南侵戦争の際の様々な国連決議と国際法(核の除去のための緊急避難、住民保護規定、対テロ作戦)、そして南北合意書(双方の関係が国家同士の関係ではなく統一を目指す特殊な関係)がその法的根拠だ。作戦計画5027は、北の崩壊が南北間の全面戦争になる場合、韓米連合軍主導で外部の干渉なしに、北韓住民の自決権原則に基づいて韓半島の自由統一を達成することになっている。

 統一新羅以降、千数百年も一つの民族国家だった韓半島が統一されるのは、歴史的にも国際法的原状回復の次元でも、そして北東アジアの平和と共同繁栄のために当然のことだ。統一は、正統性を持つ大韓民国中心でなされるべきであることも当り前だ。したがって、北韓崩壊の際、中国軍の介入は内政干渉であり侵略だ(konas)

www.chogabje.com 2013-10-30 15:36

2013/11/01 04:08 2013/11/01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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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年10月29日、ソウルの大検察庁前で自由青年連合と従北剔抉騎士団などが記者会見
2013/10/31 00:36 2013/10/31 00:36

三星電子を国家と比較すると人口1億人以上のバングラデシュの国内総生産規模だ。このような偉大な企業・三星電子を作った李秉喆李健熙の二人は、韓国史教科書の中に名前がない。

                                                           趙甲済

 三星電子が第3四半期(7〜9月)の売上高は59兆800億ウォン、営業利益10兆1600億ウォンを記録した。史上最高の業績だ。三星電子は、第2四半期(4〜6月)に続き、最高記録を塗り替えながら四半期の売上高60兆ウォン時代を前にしている。スマートフォンを売るITモバイル(IM)部門は36兆5700億ウォンの売上高に6兆7000億ウォンの営業利益を出した。前四半期より7%増加した。9月に新たに発売したプレミアムスマートフォン‘ギャラクシーノート3’が特によく売れている。発売20日余りで供給量500万台を超えた。‘ギャラクシータブ3’などのタブレットPCの販売台数も前四半期より20%以上増えた。普及型携帯電話も販売量が10%以上増加したという。半導体部門もスマートフォン市場の好调で売上高は9兆7400億ウォン、営業利益2兆600億ウォンを記録した。前四半期に比べ売上高は12%増、営業利益は17%増加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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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この調子だと三星電子の2013年売上高は230〜240兆ウォンと予想される。韓国の今年のGDPは約1200兆ウォンに達すると推定される。では、三星電子の売上高が韓国GDPの20%と言える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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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答えは‘そうではない’だ。売上高とGDPの計算方法が異なるためだ。企業の売上高をGDP額に換算する公式はない。大まかに推定すると、企業の売上高がGDPの約40%であるという(三星電子のような高付加価値業種はこの比率が高い)。つまり、三星電子の今年の売上高推定額230兆ウォンはGDPでは約90〜110兆だ。三星電子が国内総生産(GDP)の約10分の1)(約1000億ドル)を担っているという話になる。

 昨年のハンガリーのGDPは約1256億ドル、バングラデシュは約1229億ドルだった。三星電子を国家と比較すると人口1億人以上のバングラデシュの国内総生産規模だ。このような偉大な企業・三星電子を作った李秉喆李健熙の二人は、韓国史教科書の中に名前がない。

www.chogabje.com 2013-10-29 16:25

2013/10/30 05:52 2013/10/30 05: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