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国民がNLLを守護しよう”
趙甲済ドットコム
‘NLLを放棄した反逆残党に対する捜査を要求する全国大会’
2013年7月25日(木)午後6時、場所:ソウル市庁前広場
お問い合わせ:国民行動本部(本部長徐貞甲)、(02)527-4515〜6
国家情報院の第2次南北首脳会談の対話録公開によって親盧(盧武鉉残党)・従北勢力と北韓政権の‘NLL無力化’企図が確認された状況で、NLL死守国民大会が開催される。
7月25日(木)午後6時、ソウル市庁前広場で開かれる大会は、国民行動本部(徐貞甲本部長)、韓国市民団体協議会、陸・海・空軍•海兵隊予備役大領連合会、海兵隊救国決死隊など4団体が共同主管し、260以上の愛国市民団体が参加する予定だ。
この大会の共同大会長は、金東吉(延世大名誉教授)、金弘燾(金襴教会牧師)、閔丙敦(元 陸軍士官学校長)、朴世煥(国家アイデンティティ回復国民協議会議長)、趙甲済(趙甲済ドットコム代表)、高永宙(元ソウル南部地検長)である。講演は金成萬(元海軍作戦司令官)、梁栄太(自由言論人協会長)、崔仁植(韓国市民団体協議会執行委員長)、趙栄煥(オールイン・コリア代表)、邊煕宰(メディアウォッチ代表)、申恵植(独立新聞代表)氏などが演壇に立つ予定。
徐本部長は、盧武鉉・金正日会談対話録の公開で、“対話録の中にNLLを放棄すると言った盧武鉉元大統領の直接的な発言はないのではないか”と政界が泥仕合を演じているのに対して“本末転倒の論争”で、“国家反逆行為をこのまま黙認する訳にはいかない”と指摘した。
徐本部長は、国家記録院にNLL対話録原本が存在しないことについて“21世紀であり得ない”と糾弾し“検察が徹底的に捜査して関係者たちを全員法廷に立てるべきだ”と強調し、政府に対して▲NLL無力化を図った盧武鉉残党の処罰および従北勢力に流れる資金源の遮断、▲戦時作戦統制権の韓国軍転換と韓米連合司令部解体の無期延期、▲大韓民国を否定する統合進歩党の解散などを求めた。
国民行動本部など爱国団体は来月(8月15日)も、城南市野塔駅前広場で‘従北剔抉国民行動城南大会'を開催する予定だ。
www.chogabje.com 2013-07-23 15:26
北側の挑発を抑止する次元で韓米両国の迅速な合意を促す!
大韓民国在郷軍人会
わが政府が戦時作戦統制権転換の再延期問題を米国側に提案したという報道について、去る数年間、戦作権転換の問題点を指摘して再延期の不可避性を強調してき在郷軍人会はこれを全面的に歓迎し支持する。
7000万国民の生存がかかっている安保問題においては一寸の錯誤も許されない。万が一の最悪の事態に完璧に備えるのが安保だ。
郷軍は戦作権転換の再延期を推進する政府当局に大きな励ましを送り、北韓の挑発を抑止する次元で韓米両国の迅速な合意を促す。
2013年7月18日、大韓民国在郷軍人会
www.korva.co.kr 2013-07-18
연합뉴스 기사입력 2013-06-25 19:01
(도쿄=연합뉴스) 이충원 특파원 = "남편이 仁川上陸作戰에서 세상을 떠난 뒤 일본에서 차별받으면서 딸 둘을 키우느라고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그때 祖國에선 아무런 援助가 없었습니다. 그게 恨입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당시 사망한 재일학도병 박대벽(사망 당시 29세)씨의 부인 강선림(85)씨는 25일 도쿄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6•25戰爭 63周年 記念式'에서 國防部 長官 感謝狀을 받은 뒤 取材陣에게 평생 가슴에 품어온 원망을 털어놓았다.
재일동포 2세인 강씨는 나고야에서 경북 출신인 남편 박씨와 가정을 꾸린 지 4년 만에 6•25 전쟁을 맞았다. 남편은 만 4살 長女와 생후 3개월 된 次女를 남겨두고 1950년 9월 재일학도의용군 642명 중 한 명에 포함돼 祖國으로 떠났고, 같은 달 인천상륙작전 도중 세상을 떠났다.
戰死通知는 받지 못했다. 다만 朴씨의 친구로부터 "시신을 보지는 못했지만 죽은 것 같다"는 편지를 받았을 뿐이다.
남편이 6•25 전쟁에 참전해서 숨졌다는 이유로 한차례 연금을 받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강씨를 버티게 해준 건 남편이 어디엔가 살아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었다. 전사통지를 받지 못한 만큼 '혹시 북한에 포로로 잡혀갔을지도 모른다'는 실낱 같은 믿음에 의존해 남의 집 가정부 일부터 의복 수선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해가며 딸 둘을 키웠다.
그런 강씨도 최근 암 수술을 받은 뒤 남편이 살아있을 것이라는 미련을 버렸다. "감사장을 받으러 도쿄에 오라"는 주일 한국대사관의 연락을 받고도 망설였을 만큼 강씨의 건강은 악화된 상태다. 자신도 살 날이 길지 않다고 생각하는 터에 7살 위인 남편이 살아있을 리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나마 인천상륙작전과 원산•이원 상륙작전, 갑산•혜산진 탈환작전, 백마고지 전투 등에서 戰死한 在日學徒義勇軍 135人의 배우자 중 생존해 있는 이는 강씨뿐이다. 駐日 韓國大使館이 강씨를 감사장을 받을 후보로 추천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강씨의 남은 소원은 그 동안의 年金을 받아서 두 딸에게 아버지의 遺産으로 물려주는 것이다. "남편이 목숨을 바쳐서 지킨 조국이 남편을 잊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습니다"
이번에 감사장을 받은 것을 계기로 문제가 바로잡힐 가능성이 생겼다.
國家報勳處 관계자는 강씨의 주장에 대해 "그 동안의 經緯를 조사한 뒤 지금부터라도 年金을 支給할 수 있는지 檢討하겠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신문 입력 2013-06-21 18:04:32 수정 www.hankyung.com 2013-06-22 05:09:45
"姓•이름 다르지만…우리의 本籍은 서울 鍾路區 仁寺洞 34番地"
1950년 6•25전쟁 터지자 在日僑胞 靑年들 스스로 參戰
52명 戰死하고 83명 行方不明
나라 위해 목숨 걸고 싸웠는데 30여명만 生存…기억해주길
21일 서울 여의도동 중앙보훈회관에서 만난 조승배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 사무총장은 양복 주머니에서 색 바랜 흑백사진 한 장을 꺼내보였다. 血書가 쓰여진 太極旗를 손에 잡은 교복 차림의 인물들은 6•25 전쟁 당시 일본 현지에서 入隊해 參戰한 재일학도의용군. (재일학도의용군 선발1진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학도병들이 당시 참전의사를 혈서로 적은 태극기를 들고 찍은 出征式 寫眞.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제공)
1950년 재일동포 사회는 좌우익으로 나뉘어 반목을 거듭했다. 그러던 중 북한의 南侵으로 서울이 3일 만에 점령당했다는 다급한 소식이 일본 현지로 날아들었다. 祖國 守護를 위해 參戰하겠다는 청년들의 문의가 駐日代表部로 쏟아졌다. 조 사무총장은 “주일대표부가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미 극동사령부에 문의하라’고 말해줘 美8軍 편입이 결정됐다”며 “2000명 중 642명이 선발됐다”고 회고했다.
사격•제식훈련 등 2週間의 軍事訓練을 마친 재일학도의용군 1陣 76명은 1950년 9월 중순 대한해협을 건너 仁川으로 향했다. 仁川上陸作戰에 투입된 이후 재일학도의용군은 여섯 차례에 걸쳐 한국에 들어왔다.
전장(戰場)에 도착한 재일학도의용군은 미군과 한국군 부대에 배치돼 인천상륙작전, 平壤 入城, 압록강 惠山鎭 전투 등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조 사무총장은 “단일 부대가 아니라 수십명 단위로 전국에 흩어져 싸우다 보니 功을 세워도 드러나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재일학도의용군 중 52명은 전쟁 중 사망했고, 83명은 행방불명 상태다. 김병익 회장(82)은 “행방불명된 83명 중 대부분은 북한 지역에서 목숨을 잃었다”며 “戰友들의 遺骨을 찾을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재일학도의용군 265명은 미군의 순환배치 방침에 따라 1951년 1월부터 일본으로 복귀했다. 나머지 242명은 1952년 4월 체결된 조약에 따라 주권을 되찾은 日本이 入國을 拒否해 한국에 발이 묶였다. 일본 정부는 허락 없이 참전했고 일본 거주도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이들의 입국을 막았다.
재일학도의용군은 부산 소림사에서 일본행을 모색하며 재일학도의용대(현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를 만들었다. 정부가 서울로 환도한 1953년 서울 종로구 인사동 34 탑골공원 뒤편 적산가옥에 사무실을 꾸렸다. 100여명은 이곳에 머물며 지냈다. 김 회장은 “한국에서 살아가려면 본적이 필요했다”며 “일본 태생이어서 본적이 없거나, 본적이 말소된 義勇軍 70여명은 鍾路區 仁寺洞 34를 本籍으로 등록했다”고 설명했다.
재일학도의용군은 1959년 조국의 부름을 다시 받았다. 북한의 在日同胞 北送을 抵止하는 데 참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조 사무총장 등 41명은 서울 우이동 계곡에서 훈련을 받고 일본에 들어갔으며,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던 중 日本 警察에 逮捕돼 出入國管理法 違反으로 15個月 동안 獄살이를 했다.
종전 후 한동안 한국 정부는 재일학도의용군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6•25 전쟁 사망자의 유해는 한국인 주지가 운영하는 일본 도쿄 부근 사찰에 안치됐다.
정부가 이들을 예우하기 시작한 것은 朴正熙 전 대통령 때부터다. 박 전 대통령은 “이들이야말로 1等 愛國者”라고 평가했다. 1967년 처음으로 防衛褒賞金이 지급됐고 이듬해 國家有功者로 認定받았다. 앞서 1963년에는 일본에 안치돼 있던 戰死者 53명의 遺骸를 國立서울顯忠院에 安葬했다.
재일학도의용군은 현재 한국에 20여명, 일본에 10명 등 모두 30여명이 생존해 있다. 조 사무총장은 “매년 7~8명의 생존자들이 삶을 마감한다”며 “모두 세상을 떠나면 조국을 위해 몸바쳤던 재일학도의용군에 대한 역사도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이 가장 아쉽다”고 한숨지었다.
한국경제신문 홍선표 기자 ricke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