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관한 다른 생각

                                                                   
                                                                         李春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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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BREXIT)에 대한 일방적 보도

영국 국민들은 지난 6월 22일 국민투표를 통해 52:48로 유럽연합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했다. 투표 직전 여론조사가 영국인들이 유럽연합 잔류를 택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투표 결과가 나오자 전 세계의 언론들은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했다는 사실을 “정말로 잘못된 결정” 이라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영국은 바보 같은 결정을 했고, 이제 영국은 곧 경제적, 국가안보적으로 파탄 나게 될 것이며, 세계 경제에도 아주 부정적인 충격이 가해 질 것이라고 보도했다.

유럽연합은 마치 신성불가침처럼 취급 되었다. 유럽연합은 ‘좋은’ 것 인데 영국은 그 좋은 것을 저버리는 바보 같은 결정을 내렸다는 비난 투의 보도가 압도적인 주류를 이루었다.

우리나라 언론도 별 다를 바 없었다. 영국의 탈퇴 결과가 발표 된 날, 우리나라 언론들 거의 모두가 영국의 탈퇴를 극도로 부정적인 일 인 것처럼 보도했다. 영국의 선거 결과를 보도하는 언론들이나 전문가들의 말과 글들은 ‘가히 센세이셔널리즘’의 극치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다.

이들의 분석에 의한다면 영국은 곧 패망과 쇠락의 쓴맛을 보게 될 것이며 세계 경제도 침체와 혼란으로 빠져 들어갈 것이다. 언론들은 영국이 탈퇴를 결정 한 후, 마치 후회하듯 미적거리는데, 프랑스와 독일은 영국 보고 빨리 나가라고 호령하는 것처럼 보도한다. 영국 사람들이 파퓰리즘에 현혹되어 잘 못 투표했다고도 하며, 투표를 다시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고 보도한다.

거의 모든 선거 결과를 “국민들의 현명한 선택” 이라고 해설하기 좋아하는 우리나라 언론이 남의 나라, 그것도 최고, 최장의 민주국가인 영국 국민들의 결정을 ‘잘못된 결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계경제의 3.8%를 차지하는 영국이, 쫄딱 망한 것도 아니고 EU에서 탈퇴한 것뿐인데 어떻게 세계 경제가 위기에 당면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무책임할 뿐 아니라 웃기는 보도들이 아닐 수 없다. 신문을 읽고 TV를 보는 독자들이 원하는 것은 영국이 탈퇴를 한 결정은 ‘나쁜 것’이라는 비난 일색의 편파적인 해석이 아니라 영국이 ‘왜 탈퇴 했는가?’에 관한 ‘객관적’인 설명이다.


EU는 성공적인 경제 기구였는가?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소위 브랙시트(Brexit)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일이며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할 것이라고 믿었던 전문가들도 많았다. 우선 유럽연합은 영국으로 하여금 남아 있기보다는 탈퇴하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한 원인제공자였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유럽연합은 경제발전과 국가안보를 위한 매력적인 기구가 아니다. 영국이 좋은 것을 버렸다며 탈퇴결정에 경악해 하는 언론들조차 유럽연합(EU)을 정치, 경제, 군사적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었다.

유럽 국가들이 통합을 향해 달려온 지난 40년, 유럽 주요국가들 15개국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속적으로 減少 일로였다. 1970년 세계경제의 36%에 이르렀던 유럽 15국의 경제력은 2010년에는 27%로 그 비중이 줄어들었다.

우리나라 사람들 상당수가 미국의 경제적 비중이 쇠퇴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달리 지난 수 십 년 동안 미국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들지 않았다. 미국 경제가 세계에서 차지하던 비중은 1975년에는 26.3%, 2009년에는 26.9%였다. 아시아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던 비중은 1970년 15%, 2010년에는 26% 정도로 커졌다. 아시아의 성장은 미국이 아니라 유럽의 비중을 약화 시켰다.

유럽 통합이 심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경제력 비중이 줄어들고 있었다는 사실은 EU가 경제적으로도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방증한다. 최근 작고한 MIT 경제학자 레스터 서로우(Lester Thurow)는 2050년이 되면 미국의 경제력은 유럽의 약 2배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유럽 연합의 경제적 미래는, 영국 탈퇴에 경악한 언론들이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달리, 장밋빛이 결코 아니었다. 사실 그들도 유로화의 미래, 유럽 경제의 미래 등에 대해 비관적으로 예측했다.

유로화의 쇠락, 그리스의 파탄, 높은 실업률, 복잡한 각종 규제조치, 무슬림 난민의 대거 유입, 사회주의 성향의 경제 정책 등은 유럽연합이 대등한 위치에서 미국 및 아시아와 경제적인 경쟁을 할 수 없도록 했다. 유럽은 희망의 상징이 아니었다.

2015년 유럽 연합 회비로 130억 파운드(약 20조원)를 낸 영국은 유럽연합이 영국을 위해 겨우 45억 파운드를 썼다고 생각했다. 유럽 연합국 중 경제력 2위의 영국은 유럽 연합에 남아있어야 할 매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영국은 유럽통합에 열정적인 관심과 지지를 보낸 나라도 아니었다. 1973년 뒤늦게 유럽연합에 가입했던 영국은 43년 만에 탈퇴를 결정했다.


유럽연합은 애초 목적은 경제통합이 아니라 국제안보(International Security)였다

영국의 EU 탈퇴를 큰 일 난 것처럼 보도하는 언론들에 따르면 그 큰일은 ‘경제적’ 인 것일 따름이다. 물론 EU의 목적 중에 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유럽통합의 원래 목적은 ‘국제안보’문제였다. 경제가 아니었다. 경제통합은 국제안보를 위한 방편일 뿐이었다.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듯이 유럽대륙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였다. 특히 20세기 초반 유럽은 두 차례의 잔인한 세계 대전이 발발했던 지역이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독일”이 있었다.

1815년 나폴레옹을 격파한 유럽 강대국들은 비엔나 체제라는 국제회의 체제를 통해 왕정을 복고하고 평화의 시대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전쟁에 패배하기는 했지만 자유, 평등, 박애를 기초로 하는 프랑스 민권 혁명의 사상을 유럽에 전파했다. 결국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강력한 민족주의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독일 지역에는 19세기 초반까지도 독일어를 사용하는 수 백 개의 작은 국가들이 난립 해 있던 공국들의 집합에 불과했다. 이들 중 상대적인으로 힘이 강했던 프러시아의 鐵血宰相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을 원대한 목표로 삼고 이를 위해 적극적인 전쟁 정책을 펼쳐나갔다.

비스마르크는 1871년 프랑스를 격파 한 후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했다.  비스마르크가 건설한 독일제국은 유럽의 균형을 언제라도 망가트리고 유럽을 전쟁의 도가니에 빠뜨릴 수 있을 만큼 막강했다. 외교사(국제정치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독일의 힘이 너무나도 막강하다는 사실에서 유래하는 고뇌를 ‘중부유럽 Mittel Europa 문제’ 라고 명명했다.  

예상과 달리 독일제국을 건설한 비스마르크는 신생 독일 제국의 생존을 위해 정교한 동맹 및 협상을 형성하는 평화적 전략을 추구했다. 이 시기 유럽대륙에서 이격 되어 있던 섬나라 영국은 산업혁명의 여파로 팽창하는 힘을 해외로 돌려 전 세계에 걸친 식민지 확보 및 경영에 주력, 해가지지 않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독일에 패배한 프랑스는 복수의 기회를 엿보는 한편 해외로 진출, 식민지를 넓혀 가며 프러시아에 당한 수모를 달래고 있었다. 그래서 독일제국이 통일 된 직후의 시기인 1870년대를 제국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영국과 프랑스 두 강대국이 해외진출에 여념이 없었고, 신생 독일제국은 생존을 위해 노력했었기에 유럽은 당분간 평화의 시대를 즐길 수 있었다.

우리는 오늘 EU를 세계화의 상징으로 보며, 세계화의 시대를 경제적 국경이 무너진 통상의 시대로 보고 있지만, 세계화의 주요 척도인 국가들의 무역 의존도 (수출, 수입액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계산)가 가장 높았던 시점, 즉 국가들의 국제 통상 비율이 최고점을 찍었던 시기는 1914년이었다. 놀랍게도 바로 그 해 세계 1차 대전이 터지고 말았다.

막강한 독일로 인해 유래하는 소위 ‘중부유럽의 문제’가 결국 폭발하고 만 것이다. 당시 막강한 독일은 세계 정치 및 경제에서 자기가 차지하는 지위가 불만스러웠다. 국력에 비해 취할 수 있는 이익이 적었고, 정당한 방식으로 자신의 권리를 확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처지에 불만인 독일은 20세기 초반 두 번씩이나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1914년 독일이 전쟁을 일으키자 프랑스는 복수의 기회가 왔다면서 오히려 이를 환영했다. 영국도 1차 대전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했다. 다가오는 전쟁이 세계대전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1914년 8월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유럽 강대국 군인들은 겨울에 입을 동복(冬服)도 지급받지 않았다. 유럽강대국들은 모두들 ‘낙엽이 지기 전에’ 자신들의 승리로 전쟁이 끝날 것임을 확신했다.

2차 대전까지 치르고 난 후 유럽 강대국들은 ‘중부유럽 문제’ 즉 독일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전쟁을 영원히 종식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유일한 방법은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원천적으로 박탈,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강압적으로 독일을 약화 시킨다는 것은 극도로 위험한 일 이었다.

 1차 대전 후 특히 프랑스의 강력한 요구 때문에 전승국들은 독일을 강제로 무장을 해제 시켰지만 결국 나치 독일의 출현이라는 역풍을 맞았다. 그래서 2차 대전 이후, 독일을 무장해제 시키기 위해 완전히 다른 방법을 구상했다.

독일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하자는 방안이었다. 그래서 나온 발상이 유럽연합, 혹은 그 보다 더 발전된 유럽합중국 건설이었다. 이 같은 발상은 이번 EU를 탈퇴한 영국의 위대한 지도자 윈스턴 처칠의 제안이었다.

1948년 서독의 탄생이 확정 된 후 프랑스는 진짜 고민에 빠졌다. 서독이 언젠가 강대국이 되어 자신을 다시 침략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확산되었다. 반드시 막아야 만 할 일이었다. 1차 대전 직후 독일의 철저한 비무장화를 추구했다. 대 실패를 경험한 프랑스는 ‘독일이 전쟁을 다시는 못 일으키게’ 컨트롤 할 수 있는 초국가적 기구를 만들자고 제안 했다. 군비생산에 필요한 독일의 기간산업, 즉 석탄과 철강의 생산을 국제적으로 통제하자는 것이었다.

차후 유럽통합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장 모네의 발상이었고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슈망에 의해 구체적인 계획이 수립 되었다. 독일 수상 콘라드 아데나워는 이를 흔쾌히 받아 들였다. 하루라도 빨리 유럽의 일원으로 복귀해야 할 독일이 이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슈망 플랜의 골자는; ‘프랑스와 독일의 석탄 및 철강 생산 전체를 공동의 최고 감시기구에 맡긴다. 다른 나라도 이 기구에 가입할 수 있다. 석탄과 철강 생산의 통합은 경제 발전을 위한 공동기반이 될 것이다. 이렇게 마련 된 생산연대는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불가능 한 일로 만들 것이다.’ 였다.

이처럼 유럽통합은 ‘독일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안전보장 장치’ 로서 구상되었던 것이다. 1951년 4월 18일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가 출범했다. 이태리와 베네룩스 3국 등 6개국이 동참했다. 이들 6국이 유럽연합의 모체 나라들이다. 유럽 석탄 및 철강 공동체는 1957년 로마조약에 의거 유럽경제공동체(EEC)로 확대 되었고 회원국도 점차 확대 되었다.

 1973년 영국도 EEC 에 가입 했다. 영국과 함께 가입했던 덴마크는 1985년 탈퇴 했다가 다시 가입하기도 했다. 냉전이 종식된 후인 1992년, 유럽연합 조약인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체결로 유럽연합(European Union, EU)이 출범했다. 유럽 합중국이 되기 위해서는 갈 길이 아직도 멀지만 유럽연합은 국가보다 상위의 권력 조직이 과연 출현할 수 있는 가에 대한 시금석 이었다.


유럽연합은 안보문제를 해결했는가?

유럽연합의 본래 목적은 국제안보 문제였는데 과연 유럽통합은 그 목적을 달성 했는가? 많은 사람들이 유럽통합의 결과 유럽국가들 사이에서 전쟁의 발발은 더 이상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고 말한다. 프랑스와 독일이 다시 싸울 가능성은 없다고 믿는다. 이 말이 맞는 다면 냉전 종식 후 동서독이 통일을 이룩할 무렵 프랑스, 영국의 지도자들이 이를 결사반대 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독일 통일을 지지했을 뿐 아니라 통일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했던 미국은 통일 후에도 40,000 명 정도 미군을 독일에 주둔시키고 있다. 만약 주독미군 및 유럽에 주둔하는 미군이 전면 철수할 경우에도 유럽에 평화가 유지될 수 있을까? 미국이 빠진 유럽에서 프랑스와 독일이 지금처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유럽에 평화를 가져온 요인이 EU의 존재 때문인지 혹은 유럽문제에 적극 개입하고 있는 미국과 미군 때문인지 논란이 분분하다,


영국의 탈퇴는 국가의 회귀를 의미한다

유럽의 통합과정과 세계화 과정은 국가들의 국경선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경제적 의미에서 국경은 무의미하게 되었고 이 같은 현상은 ‘국가의 퇴각’ (Retreat of the State)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사실 정치 조직의 發展史는 더 큰 정치 단위를 향한 확대와 통합의 과정이었다. 씨족 국가들이 통합되어 부족 국가로 확대되었고 부족국가들이 통합되어 국민국가(nation state)로 확대 되었다.

다음 수순은 논리적으로 국민국가를 초월하는 정치 단위가 될 것이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국민국가들은 정치 통합의 마지막 단계처럼 인식될 정도로 능력이 막강했다. 국민 국가들은 좀처럼 자신의 주권을 양보하려 하지 않았고, 주권을 지키기 위해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모든 국민국가 들이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막강한 능력을 가진 조직으로 발전 되었다. 현재 지구상에서 ‘국민국가’ (nation state)들 보다 더 크고 막강한 주권을 가진 정치 조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엔, 유럽 연합 등은 주권 국가들의 연합체 일뿐이다. 이들이 보유한 힘은 회원국의 자발적 양보로서 얻어진 것이며, 회원국들을 강제할 수 있는 힘은 아니다.

영국의 경우처럼 다른 조직(즉 EU) 에 의해 자신의 주권이 감당할 수준 이상으로 간섭 당한다고 생각할 경우, 국가들은 그 조직에서 탈퇴하면 그만이다. 영국은 유럽연합이 결정하는 만큼 이민자 들을 받아들여야만 하게 된 처지를 ‘영토에 관한 주권’이 훼손당한 것으로 생각했다. 영국의 어른 들은 영국의 아이들이 ‘나는 유럽인’ (I am European) 이라는 구호를 외치는데 경악하기도 했다.

영국 국민들은 유럽연합이 점차 막강해 지며 영국의 주권에 훼손을 가하는 것을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유럽의 변방에 존재하는 섬나라로써 유럽대륙의 일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던 영국의 전통적인 외교 정책은 어느 나라와도 동맹을 맺지 않는다는 고립정책이었다. 영국은 유럽대륙 보다는 세계에 관심이 더 많았다. 영광스런 고립(splendid isolation) 정책이라 지칭되는 대영제국의 대외 정책은 영국수준의 막강한 나라만이 할 수 있었던, 문자 그대로 ‘영광스런’ 정책 이었다.

영국은 비록 세계 패권의 지위를 미국에 내주기는 했지만, 독일과 프랑스가 주도권을 가진 유럽 연합의 일개 회원국이 되어, 이래라 저래라 간섭을 받을 처지의 나라는 아니다. 9.11 이후 미국과 더불어 가장 적극적으로 반테러 전쟁에 참전, 강대국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영국의 눈에 EU의 미적지근한 반테러 전쟁정책, 혹은 아랍에 대한 우호 정책, 더 나아가 반미주의적 정책들은 비겁함의 극치로 보였을 것이다.

영국 사람들은 한때 자신의 식민지였던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를 프랑스, 독일보다 더 가깝게 느낀다. 영국인들은 독일, 프랑스를 영어를 사용하는 앵글로색슨 국가들인 미국, 캐나다, 호주보다 더 애틋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세계 최고의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국민국가 영국에 ‘국가’가 다시 되돌아 왔다. 영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곳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2016년 대선을 치르는 미국에서도, 그리고 프랑스, 독일에서도 언제 불거질지 모르는 민족과 국가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국가의 퇴각’ 현상이 멈칫하는 동시에 ‘국가의 회귀’ (Return of the State) 현상이 대두되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 현상과 더불어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는 국가의 회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この文は月刊朝鮮 2016年8月号に掲載されたものです。

http://blog.naver.com/choonkunlee/ 2016.09.02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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