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의 묘 ( Grave of the Fireflies, 火垂るの墓, 1988 )  

감독 : 다카하다 이사오(高畑勳)

원작 : 노사카 아키유키(野坂昭如)

각본 : 다카하다 이사오


목소리 출연 : 타츠미 추토무(세이타), 시라이시 아야노(세츠코 - 당시 5세)

음악 : 마미야 요시오

제작 : 지브리 스튜디오




"소화 28년 9월 21일 밤, 나는 죽었다

  이 문장 하나가 던져주는 흡인력은 매우 깊게 느껴진다. 죽음에 임박해 남기는 말을 유언이라고 했을 때, 이미 죽은 이가 “나는 죽었다”고 던지는 선언은 있을 수 없다. 결코 선언일 수 없는 선언이 담긴 문장. 우리는 죽은 이의 독백에 따라, 유령의 이끌림에 끌려 소화 28년의 어느 날로 접어든다.

  세이타(靑太)는 산노미야 역 구내 기둥에 구부정하게 기대 앉아 있다. 기둥은 장식 타일이 떨어져나가 콘크리트가 드러나 있고, 세이타는 바닥에 엉덩이를 철퍼덕 대고 양 다리는 곧장 앞으로 뻗은 채 주저 앉아 있다. 세이타가 산노미야 역에 자리를 잡은 것은 보름 전쯤이었다. 산노미야 철교 밑 암시장에서 풍겨오는 음식 냄새에 이끌려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역 구내에 있으면 배는 고파도 물만은 얼마든지 마실 수 있었다. 갑자기 조용해지는 건 밤이 왔다는 뜻이다. 그러나 밤에는 밤의 소리가 있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밤의 소리들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  세이타는 죽었다. 세이타는 오늘이 며칠이지? 며칠일까, 얼마나 지난 걸까, 열심히 생각해 본다. 계속해서 며칠일가? 며칠일까? 그것을 생각하면서, 세이타는 죽었다. 

1945년, 일본은 벌써 몇 년째 걸쳐서 전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입니다. 

남자들은 차례로 군대에 가게 되었고, 전쟁터로 보내졌습니다만, 전쟁은 점점 어렵게 되어갔고, 많은 사람이 죽어 갔습니다. 점점 먹을 것도 없어지고, 일본 사람들은 나라가 배급해 주는 조금의 식량을 쪼개서 괴로운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매일같이 미국 폭격기 B-29가 날아와 많은 폭탄을 투하했습니다. 거리와 마을은 불타, 폐허가 되었습니다.(영화가 시작되면 이런 내레이션이 흐른다.) 소화 28년 9월 21일 밤, 나는 죽었다. 산노미야 역 구내 기둥에 비스듬히 기댄 채 세이타는 죽어갔다. 죽어가는 세이타를 바라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게 뭐야, 조금 있으면 미군도 들어올텐데" 라며 무심히 바라보며 지나간다.

1941년 12월 8일 오전 11시 40분 이전의 일본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의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공업화가 이루어진 나라였다. 7,300만 노동인구 가운데 40%가 도쿄, 오사카, 교토, 고베, 요코하마 등에 산재한 주요 공업 도시에 밀집해 살아가고 있었다. 기본적인 원자재를 외국에서 들여와야 했던 섬나라 일본은 잠수함을 이용한 미국의 해상봉쇄에 특히 취약했고, 밀집된 군수시설은 적 폭격기에 대한 손쉬운 목표가 되었다. 주요 공업 도시와 그 인근에 거주하고 있는 민간인들은 군수산업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대규모 공습에 속수무책이었다. 전쟁이 격화되어갈 수록 일본의 민간인들은 전장에서 싸우는 군인들 못지 않게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측에 합류해 승전국이 되었으나 전후 일본은 사상 최악의 사회, 경제적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거기에 더해 지진이라는 천재마저 겹쳐서 위기를 증폭시켰다. 1880년대 이래 경제적으로는 서구 열강 수준을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었으나 정치 제도면에서는 후진성을 면하지 못했다.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의 일환으로 도입된 국회는 천황과 그들의 신민 사이의 유대관계를 해치는 제도로 규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강경파 국수주의자들은 서구 열강을 따라잡고, 궁극적으로 추월하기 위해서는 서구 열강을 본받아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폭력적인 방식으로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기에 일본은 후발주자로서 여러가지 제약에 걸리게 되었다. 결국 조선을 식민지화하는데 성공하기는 했으나 이후엔 서구 열강의 견제로 말미암아 지지부진하게 되었다. 경제 불황과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는 일본 사회 안에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불러 일으키게 되는데, 일본의 극우세력은 "국책에 위배되는 외래 사상"을 배격한다는 명분으로 좌파 세력에 대해 린치를 가했다.  

1925년 일본 국회는 '치안유지법'을 통과시키며 좌파 세력을 '위험사상', '혁명을 기도하는 조직'으로 규정하여 탄압하기 시작한다. 이때 만들어진 특별 고등 경찰은 이후 '특고'라 불리며 조선에서는 독립운동세력을 탄압하고, 자국의 공산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불만 세력을 폭력적으로 억압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좌파 세력에게만 행해졌고, 우파 테러 분자들에게는 우호적이었다. 실제로 1930년부터 1932년 사이 일본에서는 하마구치 오사키 수상이 극우파에게 저격당하는 사건이 있었고, 단 다쿠마 남작, 이노우에 준노스케 재무대신, 이누카이 츠요시 수상 등이 극우파 테러 조직에 의해 살해 당했다. 그러나 이런 극우 테러 분자들은 사회적으로는 '애국자'로 칭송받았고, 법정에서는 약한 형벌을 받거나 그나마도 곧이어 특사로 풀려나갔다.

   1934년 육군대신 아라키는 수상 사이토 마코토에게 "국책을 해치는 생각을 금하라. 파괴적 단체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라. 국민 총동원을 위한 총단결을 한층 더 강화하라."는 건의를 했다. 그 이후 일본은 모든 '비일본적인'인 것들을 탄압했고, 사이토 수상은 비상시국이라는 명목 아래 국민의 자유를 탄압했다. 이듬해 일본 국회는 "천황과 국가는 일심동체이다. 황금의 꽃병처럼 완전무결한 이 국체(國體)는 3,000년의 빛나는 전통을 가진 것이다"라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이런 분위기 속에 1936년 2월 26일. 과격파 육군 장교와 그들을 따르는 1,400명의 병사들은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들은 도쿄를 점거하고, 재무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를 사살하고, 내대신 사이토 마코토에게 47발의 총탄을 난사해 죽인다. 같은 육군 안에서도 온건파에 속했던 장군 와타나베 조타로를 찔러 죽인다. 이들은 곧이어 발표된 포고문을 통해 "우리 나라는 러시아, 중국, 영국, 미국 등과의 전쟁에 직전해 있다"고 선언한다. 반란군은 4일 동안 도쿄 시내를 점거하고 있었다. 결국, 자신들의 절대적 지지자로 생각했던 천황은 쿠데타군에게 병영으로 돌아갈 것을 명한다. 반란군들은 형식적인 재판만 받았고, 그 중 처형된 자는 17명에 불과했다. 1940년 8월 일본의 모든 정당활동이 금지되고, 다음달인 9월 27일엔 일본, 독일, 이탈리아의 삼국 동맹이 체결된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정치 세력으로 오로지 극우 세력만 존재하게 만들었고, 결국 1941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언론까지 앞장 서서 앵글로 색슨에 대한 성전을 주장하게 만들었다. 1941년 12월 8일 오전 11시 40분, 에도성의 높은 성벽 안에서 천황의 칙서가 발표된다. 이것은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문으로 일본 제국 기동함대가 진주만의 미국 태평양 함대를 공격하고 4시간 후의 일이었다. 히로히토 천황의 선전조칙 (宣戰詔勅 )내용은 이랬다.  

"천우(天佑)를 보유하고,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영원한 황통을 이어받은 대일본제국 천황은 충성 용무(勇武)한 신민에게 분부한다. 짐은 이에 미국과 영국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다. 황조(皇祖)의 성령이 하늘에서 우리를 수호하고 있다. 황조의 유업이 달성되고 악의 근원이 하루 속히 제거되리라는 확고한 기대 속에 짐은 신민의 충성과 용무를 믿는 바이다."
  국민학교 3학년 12월 8일 전쟁이 시작되던 날 아침, 세이타는 철봉에서 46번의 앞돌기 기록을 세웠다.

소화 28년(1945년)의 6월 5일의 공습

  나에게 세이타의 죽음이 강렬했던 것처럼 많은 이들에게 세이타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이 대목은 무척이나 강렬하게 여겨졌던 모양이다. 다카하다 이사오는 스스로 카론(Charon)이 되어 이처럼 죽은 이의 회상을 빌어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는 길'을 함께 하도록 만든다. 어둠의 신 에레보스와 밤의 여신 닉스 사이에서 태어난 카론은 망자(亡者)들을 배에 싣고‘비통의 강 - 아케론'과 ‘시름의 강 - 코키토스', ‘불의 강 - 플레게톤', ‘망각의 강 - 레테'를 건넌 뒤 '극락의 벌판 - 엘리시온'을 지나 다시 ’증오의 강 - 스틱스'를 거쳐 죽음의 신이 거처하는 하데스의 궁전으로 들어간다.

 우리들은 다카하다 이사오의 손에 이끌려 망자 세이타와 함께 비통, 시름, 불, 망각, 증오의 강을 지나 죽음의 신 앞으로 불려간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다카하다는 우리들을 내려주고, 세이타와 세츠코 남매만을 하데스의 궁전으로 흘려보내준다.

 그것은 주인공의 죽음이라는 지점에서 시작되어 다시 그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냉정한 시선으로 보여주고 우리들로 하여금 관찰자가 되어 그들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감정적으로 합류하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를 시간 순으로 재배열해 살펴보도록 하자.
  1945년 6월 5일 초여름에 접어든 일본 고베 인근의 후키아이, 이쿠다, 나다, 스마 그리고 히가시코베 다섯 마을의 하늘에 B-29편대 350대가 출현한다.

  그 즈음 중학교 3학년이었던 세이타는 근로동원에 나가 인근의 고베 제강소를 다니고 있었다. 공습을 받은 이 날은 등화관제의 날이라 그는 미카게 해변 근처에 있는 집에서 대기중이었다.  세이타의 아버지는 일본 제국 해군 대위로 순양함에 승선해 전쟁에 나갔다. 세이타는 아버지가 출항하던 날 항구에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브라스 밴드의 연주, 하늘을 가로지르며 수놓는 불꽃 놀이를 기억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제국해군 기동함대와 출항한 어느 날부터 아버지로부터는 편지 한 장 없었다. 그렇게 소식이 끊긴 것도 오래 전 일이었지만, 아무도 아버지의 생사를 알려주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주로 일본과 미국의 대결 양상이 되었던 태평양 전쟁은 잘 알려진 바대로 일본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이끄는 제국해군 기동함대가 비밀리에 일본을 출항하여 하와이 진주만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 해군 함대를 기습 공격하며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시아 전 지역을 석권할 것처럼 보였던 일본은 중국에서 장기전의 수렁에 빠지게 되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기동함대의 태반을 잃는 대참패 이후 줄곧 미국에게 수세에 몰리게 된다. 그러나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한 사실을 전쟁 막바지에 이를 때까지 국민들에게는 숨겼다. 심지어 일본 정부 당국은 정보 봉쇄와 통제를 위해 미드웨이 전투에서 생환한 부상병들을 포로처럼 취급해 별도의 수용소에 수용하기까지 했다. 일본 국민들은 전쟁의 제대로된 진행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고, 미군 폭격기들이 일본 전토를 폭격할 때 조차 전황을 속였다. 아마 세이타의 아버지 역시 이 시기엔 이미 전사했을 것이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전투기 편대와 폭격기가 은빛 비늘을 번쩍이며 높은 하늘로 날아 들었다. 세이타는 구덩이 속에 먹을 거리들을 챙겨 담은 다음 흙을 덮었다. 그리고 병든 어머니를 먼저 마을 방공호로 대피시키 뒤, 세이타는 세츠코를 등에 업었다. 가슴엔 해군 대위로 순양함에 승선한 후 소식이 끊긴 아버지의 군복차림 사진을 챙겨 넣었다.

  세츠코를 들쳐 엎은 채 밖으로 나온 세이타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폭격기에서 쏟아지는 소이탄이 목재로 만들어진 마을의 지붕, 천장, 다락방에 떨어져 내렸다. 처음엔 검은 연기만 내던 소이탄(燒夷彈)이 갑자기 일제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세이타는 어머니가 피신한 마을 방공호로 달려가려고 했지만 그쪽에서 마을 사람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다시 바다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달렸다. 달리는 동안에도 길바닥으론 소이탄이 쏟아졌고, 화마가 집어삼킨 가옥에서 튀어 오르는 불똥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오누이는 바닷가 근처의 제방 구덩이에 숨었다. 세츠코는 엄마를 찾았다. 세이타는 세츠코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니 스스로 안심하기 위해 엄마가 피해있는 방공호는 안전하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소이탄 불길이 하늘로 치솟아 올라 하늘에서 검은 소나기를 만들어 냈다.

  다음날 세이타는 세츠코를 데리고 엄마를 찾아 국민학교를 찾았다. 그곳엔 세이타의 어머니가 온몸에 화상을 입은 체 죽어가고 있었다. 세이타는 세츠코에게 차마 어머니의 상태를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운동장 철봉대에 매달려 전쟁 전의 앞돌기를 반복했다. 그날의 폭격으로 마을은 온통 폐허가 되었고, 세이타와 세츠코는 고아가 되었다.  


소이탄은 목조가옥이 많았던 일본의 민간인 가옥들을 초토화시키는데 가장 효과적인 무기 중 하나였다. 그것은 동시에 많은 민간인들의 희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폭격으로 집은 불타고 어머니까지 잃은 두 남매는 먼 친척뻘되는 아주머니를 찾아간다.

그럭저럭 얼마 동안은 지낼 수 있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냉대를 받게 된다. 세이타는 어머니의 기모노를 팔아 쌀로 바꿔 먹기도 했지만 결국 집을 나와 방공호 속에서 둘만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세츠코는 반딧불을 묻으며 중얼거린다.

"이건 반딧불 묘지야. 엄마도 묘지에 들어갔어." 라는 말을 한다.

세이타가 놀라며 세츠코를 바라보자 얼마 전 아줌마에게 들었다고 한다.

"엄만 벌써 죽어서 묘지 안에 있다고."

그순간 세이타는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눈물을 흘렸다.


1941년 12월 8일 이후부터 1945년 6월 5일까지의 일본

  일본의 제 124대 천황인 히로히토는 1926년 12월 25일 등극했다. 1890년 메이지 천황시절 반포된 교육칙어(敎育勅語 - 이에 대해서는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와 철학자 미키 기요시 편을 참조하시길)는 19세기말 대다수가 문맹이었던 일본 국민의 95%를 읽고 쓸 줄 아는 국민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러나 일본의 국민 교육은 교육칙어에 의해 민주주의의 시민이 아니라 "충성심과 효도로 영구히 한 가족처럼 뭉친" 신민으로 교육하도록 강요되었다. 교육칙어는 "국헌을 존중하고 국법을 지킬 것"을 맹세하도록 했고, "일단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면 국가를 위해 헌신하라. 그러므로 천지와 더불어 무궁한 황운(皇運)을 부익하라"고 국민에 대해 훈계했다. (대일본제국의 충성스러운 군인이었던 박정희는 이런 교육칙어를 본받아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을 반포한다. 국민교육헌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한 인간의 탄생에 대한 의미가 "민족 중흥"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뒤에 가서는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가 개인의 삶의 방식까지 규정해주고 있다.)

 우리가 국민학교 때(1968년) 국민교육헌장 필사 대회를 열었던 것처럼 당시 일본 전역에서는 천황의 교육칙어를 읽을 때는 반드시 거기에 뒤따르는 종교적 의식이 뒤따랐다. 교육칙어가 적힌 두루마리를 만지는 사람은 반드시 흰장갑을 끼어야 했고, 실수로 교육칙어를 떨어뜨리거나 잘못 낭독한 교장이 자살로 사죄한 일도 있었다. 만약 학교에 불이라도 났을 땐 학생들의 안전보다 먼저 교육칙어를 구해내야 했다.

   진주만 기습 이전부터 일본은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방공단을 구성하여 공습 대피 훈련을 실시했다. 진주만 공격 며칠 후 도쿄의 한 신문은 "바야흐로 모든 가정이 싸움터가 되었다. 이웃 사랑의 정신이 활활 타오른다"며 전국민을 전시 체제에 동원되도록 선동했다. 1943년부터 1944년까지 10에서 12세대 정도로 구성된 반상회가 전국적으로 100만 개 이상 조직되었고, 반상회 회원들은 서로를 적성국 스파이가 아닐까 감시하도록 했으며, 적기 식별법, 소이탄 처리법 등을 교육 받도록 했다. 반상회 지도자들은 각 가정을 예고없이 방문해 비상대피에 따른 준비를 감독했고, 민방위 훈련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런 훈련이 실제 일본의 국민들을 안전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공습에 대비해 만들어진 방공호는 너무 얕았고, 지붕조차 없었으며 안전하게 산 밑에 만들어진 대피호는 막상 공습이 시작되었을 때 피신하기엔 너무 멀리 있었다. 1945년 봄무렵까지 일본의 수도 도쿄에 만들어진 콘크리트 대피호는 불과 18개소에 불과했고, 그나마 수용인원도 5,000여명에 불과했다. 일본의 군국주의 정부는 민간인에 대한 안전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었거나 대량 폭격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일본은 서구, 특히 미국의 대량생산 시스템에 의한 대량 파괴 작전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처할 만한 능력이 없었음에도 전일본 국민들을 전쟁의 수렁에 몰아넣었다. 일본이 미국의 무차별대량파괴작전에 대응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개발해낸 유일한 무기는 온국민의 총화단결에 의한 총력전이었다.

  일본은 모든 선전기관과 교육기관을 총동원해 국민들을 세뇌시키기 시작했다. 여학생은 혹독한 한겨울에도 외투를 반납한 채 얇은 여름옷을 껴입고 학교에 나왔고, 학교 당국은 이런 여학생을 애국자의 표상인 양 추켜세웠다. 언론기관들은 자진하다시피 정부의 통제 아래 들어가서 그들에게 유익한 뉴스만을 보도했고, 자국에게 유리한 뉴스가 없을 때는 이를 가공하여 생산해냈다.

  전시 치하의 일본에서 특히 고통받은 것은 여성들이었다. 드레스와 기모노는 사치품으로 규탄의 대상이 되어 허름한 농민복인 몸빼를 입도록 했고, 화장, 미용실도 금지되었다. 전국적으로 우량아 선발대회가 열려 통통하게 살이 찐 아기들은 자랑거리가 되었고, 여성의 출산은 권장되어 "많이 낳자"는 슬로건이 거리마다 걸렸다. 그런 캠페인의 일환으로 모든 산아제한은 금지되었고, 국가가 결혼소개소와 신부학교를 설립해 여성을 교육하여 해외에서 근무하는 군인들과 결혼시켰다. 전시 일본 정부의 수상이었던 도조 히데키의 부인 도조 가츠코는 "개인의 어머니이기 전에 국가의 어머니"가 되기를 촉구하며 일본 국민들을 향해 "일곱 명의 아이를 두어 기쁘다"고 말했다.

  이런 열기는 전일본에 감염되어 비폭력 불살생의 종교인 불교 지도자들까지 앞장 서 총을 메고 사찰 경내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했고, 스모 선수들조차 군복을 맞춰 입고 열을 지어 행진했다. 여성들은 전선에 있는 병사들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며 '센닌바리(千人針: 1,000명의 여성이 흰천에 붉은 실로 한 코씩 바느질을 해서 1,000개의 붉은 점을 새기는 것)'을 만들어 보냈다.

  전사자를 모신 야스쿠니 신사는 매일같이 수많은 참례자들로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히로히토 천황은 종종 직접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전선에서 희생당한 전사자들을 자신과 동격인 신의 반열로 올렸다. 그러나 1943년부터 전황은 바뀌어 일본 국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다. 재즈 음악은 금지되었고, 색소폰 역시 적국의 악기라는 이유로 금지되었으며, 야구 용어조차 "스트라이크"에서 "홍큐(本球)"로 바꿔 부르도록 했다. 군에 새로 징집된 대학생 중 하나는 자신의 친구에게 "만약 내가 살아 남는다면 이 기나긴 밤, 이 끝없이 긴 밤, 별도 없이 캄캄한 공허의 시간을 이야기할 때가 있을 것이다"란 편지를 보냈다. 그는 살아남지 못했으므로 캄캄한 공허의 시간을 회상할 기회는 그에게 허락되지 못했다.

"세츠코, 뭘 먹고 있는거야?"

세이타는 유리구슬을 꺼 내었습니다.

"이건, 유리구슬이야. 사탕이 아니라구!"

세이타가 말해도, 세츠코는 계속 얼이 빠져 있습니다.

"오늘은 오빠가 더 좋은 걸 사가지고 왔어. 세츠코가 좋아하는 걸로..."

그러나, 세츠코는 세이타의 말은 들리지 않는듯 작은 돌을 내밀었습니다.

"오빠! 자, 밥이야. 자, 먹자. 안먹어, 오빠?"  

 

"세,세츠코! 정신차려. 자, 수박이야. 훔친거 아니야."

세이타는 수박을 꺼내서, 조금 잘라 세츠코의 입에 넣었습니다.

"맛있어?"

세츠코는 힘없이 미소를 지었습니다.

세이타는 한숨을 쉬며, 세츠코의 손에 수박을 쥐어 주었습니다.

"기다려. 지금 곧 밥 지을 테니까."

"오빠, 고마워."

그렇게 말하고, 세츠코는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세츠코는 그대로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1945년 8월 22일이었습니다.

반딧불의 묘는 일본인들의 반성없는 반전영화인가?


   다카하다 이사오의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반딧불의 묘>를 처음 접한 이들 중 상당수는 이 작품이 비록 눈물이 쏙 빠질만큼 감동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영 캥긴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일본이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말하는 것이 싫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이들에게는 '나카자와 케이지'의 <맨발의 겐>을 읽으라고 권해주고 싶다. 모두 10권의 만화책으로 국내에도 나와 있다. 그런 이들에게 <맨발의 겐>은 불평의 여지가 거의 없을 것이다. <맨발의 겐>은 그 자체로도 매우 감동적이지만 <반딧불의 묘>에 비해 일본의 반성이란 면에서 보다 확실히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반딧불의 묘>에 대한 일부 사람들의 그런 지적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좀더 심하게 말해서 나는 <반딧불의 묘>를 보면서 일본이 반성하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이들에 반대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그런 공격성의 배후에 숨겨진 극우적 심성이 오히려 두렵기 까지 하다. 나는 <반딧불의 묘>를 보면서 이 작품이 왜 이토록 '죽음'에 대해 담담할까? 를 고민했다.  

일본의 저명한 '나오키 문학상'을 받은 <반딧불의 묘>는 원작자 '노사카 아키유키'의 실제 전쟁 체험을 바탕에 두고 쓰여졌다. 그는 이 불쌍한 오누이의 죽음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냉정하고,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것은 다카하타 이사오가 만들어낸 애니메이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의 주요 책임국가로서 일본은 물론 아시아 전역에 아직까지 피해자가 생존해 있는 '태평양전쟁'이라는 민감한 역사적 소재를 다룬 일본 영화는 좀처럼 보기 드물었다. 더군다나 애니메이션에서 다뤄지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반딧불의 묘>에서 감독은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듯 관찰자의 냉정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작품 속에서 전쟁 장면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은 초반부에 등장하는 미군의 공습이 전부다. 그 이후엔 열 네 살 짜리 소년과 네 살 짜리 소녀가 전쟁통에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같은 시기에 <이웃 마을의 토토로>를 통해 본격적인 산업화 이전 일본의 원형질, 이웃이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족처럼 지내는 농촌 공동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을 때, 다카하다 이사오는 전쟁 중에 어머니를 잃고, 이웃의 무관심 속에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는 남매 이야기를 그린다. 그는 비정한 현실을 보여준다.

   친척집에서 쫓겨나고 방공호에서 살며 굶주림에 시달리다 세츠코를 업고 찾은 병원에서 의사는 진단만 내려줄 뿐 이들 남매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않는다. 세츠코가 죽은 뒤 삶의 의지를 잃은 세이타에게 전후의 일본 사람들은 그저 살기에 바쁠 뿐 이웃의 세이타에겐 무관심하다. 결국 세이타는 산노미야 역의 기둥에 기댄채 죽어간다. 그렇게 죽어가는 세이타 옆을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미군들 눈에 어떻게 비칠까를 걱정하며 지나갈 뿐이고, 역무원은 시체가 하나 더 늘어났다고 귀찮아 한다. 다카하다는 능수능란한 카메라 워크를 보여주지도 않고, 그는 관객들로 하여금 세이타의 입장에 섣부르게 자신을 동화시키도록 하지 않는다.

  다카하다 이사오는 관객들이 세이타의 입장에 자신을 동화시켜 관찰자의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막는다. 다카하다 이사오는 전쟁에 대해 말하지 않음으로 해서 전쟁에 대해 말하고, 느끼도록 만든다.

세이타와 세츠코는 일본 제국 해군 대위의 가족이고, 세이타는 죽을 때까지도 전쟁이 끝났는지 일본이 승리했는지, 패전했는지 알지 못했다. 세이타는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것은 당시의 일본 국민들 대개가 그랬다.

몰랐으므로 그들은 죄가 없는 것이었을까?  다카하다 이사오는 관객들에게 그것을 묻는다.

 
세이타는 죽을 때까지도 전쟁이 끝났는지 일본이 승리했는지, 패전했는지 알지 못했다. 세이타는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것은 당시의 일본 국민들 대개가 그랬다. 몰랐으므로 그들은 죄가 없는 것이었을까? 다카하다 이사오는 관객들에게 그것을 묻는다.

반딧불의 묘와 전쟁


   다카하다 이사오는 몇 차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반딧불의 묘>에 대해 일본의 책임을 반성하지 않고, 전쟁의 피해자로서 그려지는 듯 하다는 지적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밝혔다.

그는 "한국인들이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반딧불의 묘>는 결코 일본을 정당화하려했던 것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그리려고 노력한 것이지, 거기에 특별한 의도를 부여한 것은 절대 아니"라고 답했다.

다카하다 감독은 이에 덧붙여 "원인부터 따지지 않으면 전쟁에 반대할 수가 없다. 어째서 전쟁을 피하지 못했는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작품을 만든 후 언론매체 등에서 그런 이야기를 자주 말해왔다"고 했다.

그는 전시의 공습을 경험한 자신의 체험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공습의 실상이란 어떤 것인지를 경험자로서 표현해보고 싶었다. 공습이란 흔히 만화에 나타나는 것처럼 쾅쾅거리거나 박력있는게 아니라, 어느 순간인지 모르게 쏟아져내려서 조용히 불타버리는 아주 이상한 것"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공습은 <반딧불의 묘>에서 그렇게 냉정한 시선으로 그려진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가리켜 '심정적 좌파'라고 하는데, 토에이 동화 시절 그의 선배로 노동조합 활동에 그를 끌어들인 사람이 다카하다 이사오였다. 다카하다 감독은 일본의 우경화와 자위대파견법 제정 등에 대해 분명한 반대 의사를 밝혔고, 일본이 세계에 공헌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군사력이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 헌신해야 할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반딧불의 묘>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대표작 중 하나로 원래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마을의 토토로>와 함께 동시상영작으로 개봉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다카하타 감독은 오랜 동안 리얼리즘에 기초를 둔 애니메이션 작가로 알려져 왔다. 그는 <엄마찾아 삼만리>를 제작하면서 이미 왕방울 같은 눈을 굴리며 어른들에게 투정이나 부리는 어린이가 아니라 자아를 지닌 한 명의 인격체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가는 어린이를 그려왔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감독은 과거 폐허가 된 일본과는 다른 발전된 일본의 현재를 보여준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전쟁은 누구의 책임인가?


인류는 언제나 전쟁에 반대하다고 말하면서 어째서 전쟁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가? 그것은 전쟁으로 인해 이득을 보는 이들, 아니 전쟁과는 무관한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어야 하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화려한 옷을 입고 "즐거운 나의 집"을 들으며 살아간다. 전쟁이 비참한 것이 아니라 전쟁이란 극한 상황이 우리 속에 잠재해 있는 이기적인 속성,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내게 만든다. 우리는 전쟁이란 잔인한 게임을 통해 우리들이 함께 살아가는,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들을 죽이고, 그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번영을 누려간다.

   다카하다 이사오는 결코 일본이 피해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심지어 이 어린 오누이조차 전쟁의 일부로 그리고 있다. 그들에게도 죄가 있다. 물론 그 죄란 일본에서 태어난 죄다. 우리는 걸프전과 그 결과 경제 봉쇄된 이라크에서 죽었거나, 죽어가는 수없이 많은 어린이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도 죄가 있다. 그것은 오로지 한 가지 이라크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들 오누이의 죄, 역시 불행히도 그들의 죽음으로 참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을 살아남은 일본인들은 뉘우쳐야 한다. 물론 반성 없는 일본에 대해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끔 그 하릴없는 분노가 때로는 상대방의 죄과와 닮아가고 있음을 느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당신과 내가 일본을 너무나 증오해서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떨어진 핵폭탄을 당연하게 여길 때, 이 지구상의 그 어느 곳에선가 전쟁의 위기는 그만큼 늘어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대량살상무기가 아니다, 그것은 증오와 무관심이다. 우리 안에 깊숙이 감춰 둔 '증오의 무덤'을 파헤치는 흡혈귀의 망토엔 분명 '무관심'이란 저주가 적혀있을 것이라는.  

 

"뭐야, 이거?" "그런 건 버려. 내다 버리라구."

역무원이 그것을 바깥으로 내던졌다. 달캉달캉 소리가 나는 그것, 세이타의 품 속에 있던 알사탕통을 역무원은 여름 잡초가 우거진 부근의 어둠 속으로 던졌다. 그것은 여동생 세츠코의 하얀 뼈였다. 뚜껑이 열린 통에서 하얀 가루가 쏟아지고, 그 속에서 작은 뼛조각 세 개가 굴러 나왔다. 그 소리에 풀 숲에 머물던 반딧불이 이삼십 마리리가 놀란 듯 부산스레 빛을 깜박이먀 날아다니다 흩어졌다.



노사카 아키유키(野坂昭如), 반딧불이의 무덤


원작자 노사카 아키유키는 1930 가나가와 가마쿠라에서 태어났고,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다양한 직업을 거쳐 소설가이자 칼럼니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1963 처녀작 <에로사 스승들> 발표하며 등단했는데, 성적인 주제를 신랄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담아 내어 주목을 받았다. 1967, 연합군 점령에서 비롯된 세태를 다룬 <아메리카 녹미채> 전쟁과 공습, 폐허의 체험을 소설화한 <반딧불이의 무덤> 발표했다. 다음 , 작품으로 나오키 문학상을 수상했다.


노사카 아키유키는 문장 하나가 페이지를 넘길만큼 극도의 만연체이지만 호흡만큼은 늘어지지 않는 특이한 문체라고 한다. 1968 그의 작품을 심사한 심사위원들도 그의 문체에 대해


"신기한 재능이다. 오사카 말의 장점을 살린 장광설이 종횡무진 펼쳐지면서도 쓸데없는 수다는 조금도 없다. 아주 정제된 문장이다. 훌륭하달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수식어의 행렬 속에 벌거벗은 현실을 깊은 주름까지 감싸안으면서, 참혹하고 추잡한 것으로부터 결코 눈을 돌리지 않는다" 평했다.


<반딧불이의 무덤> 저자 노사카 아키유키의 실제 경험을 소설화한 것이기도 하다. 그가 태어난 1930, 이듬해인 1931 일본은 만주를 침공한다(만주사변). 그가 소학교에 입학하던 1937년엔 노구교 사건이 일어났고, 중학생 때인 1941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다. 그가 조금 일찍 태어났다면 가미카제 특공대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전쟁 1 4개월된 그의 여동생은 영양실조로 죽고 만다.


그는 "나는 적어도 소설에 나오는 오빠만큼 동생을 예뻐해 주었어야 했다. 지금에서야 무참히 뼈와 가죽만 남아 죽어갔던 동생을 통탄하는 마음 가득하여, 소설 속의 세이타에게 마음을 담았다. 나는 그렇게 상냥하지 못했다."


노사카 아키유키는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작가는 실제로 고베에서 공습을 경험했다. 중학교 3학년 때의 일로 살던 집이 불타 친척집으로 피신하게 된다. "나를 규정하자면, 불탄 터에 자리잡은 암시장으로 흘러든 도망자라고 하는 좋을 지도 모르겠다. 공습으로 인해 불길이 치솟는 아수라장과 뒤이은 혼란 속에서 부모를 잃고, 혼자만이 살아남았다. 타는 집을 향해 마디, '부모님' 불렀을 , 나는 곁눈질도 하지 않고 산을 향해 뛰어 달아났으며, 뒤통수가 당기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드디어 소년원에 들어가 기아와 추위 탓에 차례로 죽어가는 소년들 속에서 나만이 마치 동화 속의 주인공인 행운을 잡아 가정생활로 복귀했다. 여기서도 나만 도망쳤다. 뒤도 돌아보고 내달았다. 자신에 대한 어리광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뒤통수가 근질거린다. 나는 도망치고 있다."

노사카 아키유키의 <반딧불이의 무덤> 그가 자신의 여동생에게 바치는 일종의 레퀴엠이자,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쓰인 글이기도 하다.

"반딧불이의 무덤- 노사카 아키유키 지음/ 다카하타 이사오 그림/ 서혜영 옮김/ 다우 - 2003" 참조

     


2010/08/14 08:19 2010/08/14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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